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김영민 지음/한겨레출판·1만8000원
김영민 지음/한겨레출판·1만8000원
철학자 김영민(사진) 한신대 교수가 한 달 사이에 두 권의 저서를 잇달아 펴냈다. 먼저 나온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은 짧은 글 100편을 엮은 철학적 에세이 모음이며,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는 철학 에세이라는 형식은 같지만 호흡이 조금 더 긴 글들의 묶음이다. 지은이 특유의 진지한 사유가 흐름을 이루어 관통하고 있어서, 두 권으로 된 하나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 김영민의 글은 독자에게 초식동물의 은근과 끈기를 요구한다. 문장들의 뜻을 알려면 소처럼 천천히 저작하고 되새김질해야 한다. 그의 독특한 문체는 사유를 촉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명사든 부사든 단어들은 문장 속에 낯선 모습으로 배치돼 있는데, 그의 표현을 빌리면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쓰고 “자신의 말을 남의 물건을 대하듯 가만히 대함”으로써 이런 낯섦의 효과가 나타나는 듯하다. 그리고 그런 낯선 문장은 그의 사유가 그만큼 관습에서 벗어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나태를 버려라’라는 명령문이 책머리를 장식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완강하게 생각의 관성을 압박하는 문장들이 김영민의 문장들이다. 그러나 일단 그 문장들의 리듬에 익숙해지면 지은이의 사유와 교신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 낯선 문장들을 부려 지은이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지은이는 책들의 제목에 요지를 밝혀 놓았다.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에서 그가 탐색하는 것은 ‘비평의 숲’이며 거기서 발견하는 것이 ‘동무공동체’다. 연전에 펴낸 <동무와 연인> <동무론>에 이은 ‘동무론 3부작’의 완결편이 이 책이다. 그렇다면 ‘비평의 숲’이란 무엇인가? 지은이의 설명들을 모아보면, ‘비평의 숲’이란 “‘공부가 된 생활’과 ‘생활이 된 공부’가 겹치는 곳” 다시 말해 “비평이 생활과 일치하는 곳”이며, 이렇게 비평과 생활이 일치하는 ‘동무들의 공동체’다. ‘비평의 숲’의 정체를 알려면 비평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지은이는 비평을 ‘화이부동’(화합하되 하나가 되지 않음)과 ‘화이불류’(화합하되 휩쓸리지 않음)로 설명한다. 동무란 이런 화이부동·화이불류의 비평적 관계를 지속할 때 부르는 이름이며, 그 동무라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 비평의 숲인 셈이다.
지은이는 비평을 (심리)상담이나 (정신)분석과 비교해 설명하기도 한다. 지은이가 보기에 상담과 분석은 돈을 주고받고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에서 우선 비평과 다르다. 또 상담은 ‘일방적 조언의 형식’이어서 상담자에게나 내담자에게나 어떤 소외감을 남긴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가 하면 분석은 “‘자기를 찾아가는 탐문의 여정’의 형식”을 취하지만, 일종의 자기분석이어서 결국 자기 안에서 맴돌다가 끝나기 십상이다. 이와 달리 비평은 “상담가의 일이나 분석가의 작업이 아니라 동무로서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비평은 동무관계다. 지은이는 비평이 “성숙이 되고, 만남이 되고, 사귐이 되고, 평등이 되고, 자유가 되고, 해방이 되고, 치유가 되고, 구원이 되는 전례 없는 꿈” “숱한 거목들의 화이불류로 가능해지는 ‘비평의 숲’이라는 꿈”을 꾼다.
지은이는 비평의 숲을 이루는 동무공동체를 “인문연대의 미래적 형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시 말해 동무공동체는 ‘인문학적 교양’의 공동체이다. 지은이는 ‘인문학적 교양’이 무엇인지를 그 ‘적’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속물·건달·신자·소비자가 ‘인문학적 교양의 적’이다. 속물은 인문학을 빌미로 삼아 현실에서 힘이나 돈을 노리는 자들인데, 대학에서 볼 수 있는 전문가 속물, 출판·매체의 상업주의에 기생하는 딜레탕트 속물로 나눌 수 있다. 속물이 교양의 자격을 갖춘 속악한 자라면, 건달은 아예 교양이라는 비용을 내지 않은 채 신분의 상승을 노리는 자를 가리킨다. 힘들여 교양을 구하지 않고, 교양 있는 척하며 상승의 기회만 보는 자가 건달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신자는 신앙의 대상에 고착돼 교양에 둔감한 자이며 “원리상 그런 공부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존재”다. 마지막이 소비자인데, “우리 시대에 가장 보편적이며 중요한 현상”이다. “이 소비자본주의적 무대의 주인공들은 교양을 구매할 수 있다고 믿는 최초의 인간들”이다. “소비자라는 이름의 이 구경꾼들처럼 교양을 살 수 있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실제로 구매하는 이들은 오직 우리 시대만의 풍경이다.”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에서 말하는 그 ‘어긋난 세속’이 말하자면, 이런 인문학의 적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이다. 인문학적 교양의 진정한 ‘가치’는 ‘값’이 없어서, 황제나 대기업 총수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인문학적 교양은 그 세속을 어긋내는 방식으로 길을 여는 것을 말한다. 세속과 불화하면서 그 고통과 상처를 안고 길을 뚫어내는 곳에 열리는 것이 동무공동체로서 비평의 숲이다. 그 숲은 또한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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