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학파의 서예가 이광사
강화학파의 서예가 이광사
빛과 그림자가 크게 엇갈린 생이었다. 원교 이광사는 왕손에다 부친과 종형제들이 모두 학문과 예술이 뛰어나 ‘육진팔광’이라 불렸던 명필가문 출신이다. 그러나 영조가 왕위에 오르고 소론이 실각되면서 “왕손 집안 많은 식구가 생매장당하듯” 몰락하고 이광사는 벼슬은 물론 생계조차 꾸려나갈 수 없는 몸이 된다. 강화학을 이끈 정제두와 제일가는 서예가였던 윤순을 스승으로 모시고 당대를 주름잡던 문인들과 맘껏 교유했지만 을해옥사에 연루되어 23년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살았다. 마흔살에 이미 명필가라는 명성이 높아 유배지에서까지 글씨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들끓었지만, 문인들은 그의 글씨가 “의기가 지나쳐 속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며 폄하하기 일쑤였다.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를 보러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가 원교가 쓴 대웅보전 편액을 보고 당장 떼어버리라고 했다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지은이는 원교 이광사를 키운 비옥한 가문과 그를 단련한 불우한 운명을 오가며 그의 참모습을 헤아린다. 첫째 부인은 쌍둥이를 낳다 죽고, 그가 옥사에 갇혀 극형을 당했다는 소문에 두번째 부인도 자결한 외롭고 불행한 생이다. 하지만 두 아들 이영익과 이긍익을 통해 강화학의 기개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조선의 고유한 서예법인 동국진체를 확립한 <서결>과 경학, 패관잡서, 문자학의 방대한 지식을 집대성한 <두남집>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시련과 유배의 세월이 길었던 덕이다. 진실이 극에 이르면 단순해진다. 이진선 지음/한길사·1만7000원.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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