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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소설속 ‘김원우의 소설창작론’

등록 2005-07-07 19:04수정 2005-07-13 01:52

 김원우 소설집 <젊은 천사>
김원우 소설집 <젊은 천사>
김원우씨의 소설을 읽다 보면 현미찹쌀잡곡밥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의 차지고 영양가 높은 문장들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대충 씹어 넘겨서는 곤란하다. 꼼꼼하고 집요한 저작이라야 그 맛과 양분을 온전히 누릴 수가 있다. 줄거리를 좇아가며 듬성듬성 건너뛰는 독서를 그의 소설은 허락하지 않는다. 김원우 소설의 알짬은 사건과 줄거리에 있기보다는 그것들을 그야말로 저작하듯 짓씹어 소화하는 문장에 있기 때문이다.

김원우씨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손 닿는 곳에 반드시 국어사전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큰 사전일수록 좋다. 사전을 뒤져 확인해 보아야 하는 까다로운 단어 한둘쯤이 포함되지 않은 글이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지론인 탓이다. 그것은 독자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자는 악취미의 소산이 아니라, 소설이란 무릇 모국어를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그 나름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

김원우(58)씨의 새 소설집 <젊은 천사>(세계사)에는 두 개의 중편이 묶였다. 표제작과 <벙어리의 말>이 그것으로 둘 다 200자 원고지로 쳐서 500장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이다. 중편에 대한 그의 ‘편애’ 역시 호가 나 있다. 세태에 대한 반성과 야유를 주로 삼는 그의 소설 특성상 장편과 단편의 중간 길이인 중편의 호흡이 제격인 때문이리라.

두 중편 <젊은 천사>와 <벙어리의 말>은 나란히 지방대학의 교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벙어리의 말>에는 아예 대학 문예창작과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김 교수’가 등장한다. 그를 대구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인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 본대도 이상할 노릇은 없어 보인다.

<젊은 천사>는 관찰자인 ‘김 교수’가 영문과의 또래 교수인 ‘심 교수’의 행방을 궁금해하면서 그의 개인사를 반추하는 내용을 얼개로 삼고 있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간 심 교수가 개강을 코앞에 두고도 귀국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예 행방마저 묘연해져 버린 것이다. 심 교수의 실종이 고문을 일삼던 아버지 심 형사의 과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관찰자인 김 교수의 판단이며, 그를 통해 작가는 한 개인사에 투영된 시대의 아픔과 모순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줄거리 요약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역시 세태에 대한 작가 특유의 삐딱한 관찰과 품평이라 할 수 있다. “관행이란, 나아가서 어떤 제도란 끈질기고 편리한 만큼 불가항력적인 위세를 스스로 거느리는 것이었다”(10쪽)라거나 “근엄해야 할 캠퍼스 속인데도 야단스럽기는 사람의 언행이나 건물의 구조나 마찬가지였다”(12쪽)는 등의 진술은 완연 ‘김원우 표’라 할 만한 것들이다.

작가 제반 의식보다 한걸음 앞서야


야유가 지나쳐서 능멸에 가까운 평가는 <벙어리의 말>에서 한층 두드러진다. 현직 작가이기도 한 김 교수는 문학과 글쓰기에 관해 뚜렷한 주관을 지닌 인물로, 자신의 판단 기준에 미달하거나 어긋나는 인물과 현상에 대해서는 신랄한 평가를 서슴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어린 나이에 천생재주가 상대적으로 돌올한 게 분명하나 추천해주는 책 따위도 건성으로 읽고 나서 그 격조를 웬만큼 알았답시고 아무 데서나 떠벌리는 치들, 아무리 뜯어보아도 무딘 필력임에 틀림없으나 같잖은 시기심과 얄미운 공명심으로 똘똘 뭉쳐져서 오로지 제 잇속만 챙기려고 잔뜩 숙인 머리통부터 한사코 디미는 시건방진 축들, 피상적이나마 여러 방면의 잡다한 글줄을 늘이고 또 그 소양을 바탕으로 온갖 구구한 사연들을 기계처럼 짜맞춰 버릇하는 품 갈망에는 지칠 줄 모르나 그 몸에 밴 얄궂은 지성(至誠)이 결국에는 자기애로서의 보비위질로 비치는 것들, 요컨대 그 어리무던한 일체의 눈치꾸러기들…”(136쪽)

중편 <젊은 천사> <벙어리의 말>
글쓰기 풍토 · 대학가 · 제도…
세태에 대한 신랄한 야유
문단에 녹은 옹이 잡으려면
국어사전 곁에 두고 탐독하라

<벙어리의 말>은 김 교수가 자신의 소설창작론 강의를 듣는 노처녀 편입생 ‘허영숙’의 습작을 지도하는 과정을 축으로 삼고 있다. 소설의 상당 부분은 작가 김원우씨의 강의 내용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작가의 자의식이든 소설 작품 자체의 그것이든, 쉬운 말로 세계관이지, 그것이 이 시대의 제반 의식보다 딱 한 걸음쯤 앞서갈 수 있어야 해”(160쪽)라든가 “단어·문장·문단의 경제성 제고라는 기율은 인물·일화·사건에 따르는 일체의 정서·사고·현실의 부조 및 조탁에도 그대로 작용해야 옳다”(205쪽), 또는 “문장은 우선 술술 읽혀야 하고, 강물처럼 그렇게 유유히 흘러가는 단계에 이르면 그 다음부터는 쭉쭉 뻗어나는 나뭇가지에 맺히는 옹이 같은 것이 한 문단 속에 두어 개 이상씩은 꼭 들어앉아 있어야 하며, 초고가 일단 써졌으면 화면에 떠다니는 글자로 첨삭하지 말고 프린터로 빼낸 ‘종이 위의 문장’을 반드시 소리내어 읽으면서 전후 문맥을 다듬어 가라”(219쪽)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작가는 오늘날 문단의 풍토와 소설 경향에 대해서도 불만을 감추지 않는다. 그것을 반드시 완고하고 보수적인 ‘꼰대’의 불평이라 치부하지 말고 한번쯤 새겨봄직하거니와, 가령 이런 것들이다: “소모품의 기계적 양산으로 미친 듯이 돌아가는 오늘의 경제생활을 그대로 반영하듯 문학판에서도 비내구성 상품이 넘쳐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인데…”(200쪽), “내 눈에는 오늘의 우리 젊은 소설들의 여러 제목들이 너무 노골적·선정적·기교적이어서…”(227~8쪽), “파딱이는 전자문명의 여러 이미지, 날로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오늘날의 제반 생활세계 등이 그 부분적 연원이지 싶은 현대의 한 속성 곧 광포성과 엽기성을 빙자해서 폭행, 자살, 살해, 시체유기, 시체매장 따위의 끔찍한 돌출행동 내지는 우발적 범죄를 오늘의 우리 젊은 소설 속에서 자주 목격하는데…”(254쪽) 등등.

말이 우릴 지켜주지 못한다면…

문학판에 대한 비판은 신춘문예 심사의 부실과 불공정을 향해서도 화살을 겨누는데, 아닌 게 아니라 소설 속에서 김 교수가 총애하고 신뢰하는 허영숙이 낙선하고 거꾸로 기대는커녕 호되게 꾸짖었던 수준 미달의 다른 제자가 당선하는 결말은 차라리 김 교수의 비판과 냉소가 타당한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마무리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어이없는 결과를 보면서 김 교수는 “인생이란, 또 그 세부로서의 삶의 곡절이란, 더 크게는 이 사회의 모든 제도란 그런저런 복마전의 연속일지 모른다는”(260쪽) 체념에 가까운 결론으로 주저앉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에 대한 신뢰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작가다운 다짐이야말로 이 소설과 소설집 전체의 총괄이라 해야 할 것이다. 허영숙의 습작소설 속 한 구절로 표현된, 김 교수와 김원우씨 자신의 심정이다: “말이 나를,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면, 그래서 우리의 생업도 자꾸만 삐꺽거리면 이 일터의 우리 전부는 얼마나 비참해질까요.”(260쪽)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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