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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결핍투성이 십대, 그마저 없었다면…

등록 2011-07-15 16:53수정 2011-07-18 16:44

청소년 백일장에서 글을 쓰는 문학소녀들. 혼란스러운 십대 때 글쓰기와 책읽기는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청소년 백일장에서 글을 쓰는 문학소녀들. 혼란스러운 십대 때 글쓰기와 책읽기는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북하니 특집] 마음의 온도를 높여봐요
황선미 작가가 말하는 성장기, 나에게 책은?

책읽기와 이야기짓기로 성장통 견뎌
나를 학대하지 않게 지켜줬던 책의 힘
김찬삼 여행기 통해 미지의 세계 품어

나의 십대는 결핍투성이였다. 어디 그때만 그랬을까. 어느 날 갑자기 농촌 사회에서 중소도시 변두리로 내몰렸던 성장기 전체가 박탈감뿐이었으니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뭐 하나 번듯하지 못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 반에서 중학교에 가지 못한 사람은 공장에 들어간 애와 나 둘뿐이었다. 집안이 어려웠다느니 그래서 중학교 진학을 못 했다느니 하는 궁색한 말을 또 하는 거 정말 싫지만 나라는 사람이 거기서부터 나왔으니 어쩔 수 없다. 한 반이라도 말을 섞어보지 않았던 그 애가 내게 공장 주소가 적힌 쪽지를 주었다. 편지 교환하자면서. 인제 보니 우리가 비슷한 데가 있다고 느꼈던 걸까. 나는 돌아서면서 그 쪽지를 찢어버렸다. 그녀에게 화가 났다기보다 내 처지가 비참하고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지금껏 그 친구에게 참 미안하다. 덩치가 커서 우리보다 언니 같았고 늘 말이 없었던 그 친구가 내게 쪽지를 줄 때는 나라는 애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내 속에서는 불덩이처럼 ‘난 너랑 달라’ 하는 심정이 솟구쳤던 게 사실이다.

졸업과 동시에 내 삶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친구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낮에는 집안에 있다가 주로 밤에 움직였고, 그즈음 내 일상은 코피 흘리기와 하나같이 슬픈 결말인 이야기 짓기였다. 이상하게도 코피가 자주 났는데 난 내가 피를 흘린다는 사실이 그리 싫지가 않았다. 코피가 멈추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딱지가 앉을라치면 부러 건드리거나 코를 세게 풀어서 다시 피를 보고야 마는 행동을 꽤 오래 지속했다. 이런 심리에는 대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못된 버릇보다 몸의 치유 능력이 대단했는지 결국 코피는 멎었고 거기에는 활자의 마력이 한몫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책읽기와 이야기 짓기의 힘은 굉장한 거다. 자학적인 그 행위를 조용히 잠재웠으니.

지금처럼 책이 흔했다면 내가 그토록 절실하게 책을 갈망했을까. 뭐든 읽어댔다. 잡지든 삼류 소설이든 사전이든 무협지든 만화든. 더는 읽을 게 없자 사전을 뒤적이며 이름 짓기를 했다. 이야기의 유기성과 인물에 의미 부여하기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고 말할 수 있다. 더는 나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지켜내게끔 붙잡아준 게 책이었다는 데에 나는 늘 감사함을 느낀다. 가장 이지적인 보호를 받은 셈이다.

매체로부터 종종 나를 변화시킨 책 하나를 소개해 달라는 말을 듣는데 이럴 때마다 나는 난감하다. 나에게 특별한 책 한 권이라는 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읽었던 모든 책들이 나에게는 중요했고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작가를 꼽는다면, 그때 나를 지켜준 대상이 있다면 바로 김찬삼이라는 사람, 그분의 여행기라고나 할까. 아무것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어리고 불안하고 불온한 십대의 현실에서 그마저 없었다면 내가 무엇을 움켜쥐었을지 아찔하다. 분노와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나로서는 얼마든지 유혹에 빠질 수 있었으니까.

중국 무협지도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으나 결국 꾸며진 이야기고 허황되다는 인식, 속속들이 읽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남곤 했다. 그러나 김찬삼의 여행기는 달랐다. 제법 두꺼웠고, 활자가 작고, 내용이 날것 그대로였어도 거기에는 어린 내 호기심을 끝없이 자극하는 에너지가 있었다. 간간이 흑백사진도 실려서 여행기가 꾸며진 게 아니라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아, 얼마나 부러운 여행이고 확인하고 싶은 사실들이었는지. 남들 다 가는 지척의 중학교에도 발 디디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가 감히 아프리카며 남미 등 미지의 세계를 가슴에 담은 것이다. 그것은 우주에 호기심을 갖는 것만큼이나 다만 꿈에 불과한 열망이었다.

그러나 남모르는 열망, 비밀이라도 가져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나 스스로 내 존재를 인정하는 최소한의 근거라는 걸.


황선미/동화작가
황선미/동화작가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그 경험의 종류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를 결정한다. 내 작품의 인물들이 다소 어둡고 맞서 견뎌야 하는 현실을 가진 특성 속에 있다면 그건 다분히 내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내 인물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다분히 내 성장기와 맞닿아 있는 탓이리라. 그런 요인에는 김찬삼이라는 여행자가 들려주었던 낯선 곳의 이야기들. 그 미지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그로부터의 상상력이 선물처럼 작용했던 게 아닐까. 그 여행자는 아마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어떤 아이가 그 여행기를 야금야금 받아들여 결국 소도시 변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걸.

황선미/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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