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베크
소설속 인물로 자신을 등장시켜
잔인하게 살해하는 신랄한 풍자
논쟁적 작가의 공쿠르상 수상작
동물성 맞선 식물성 승리도 부각
잔인하게 살해하는 신랄한 풍자
논쟁적 작가의 공쿠르상 수상작
동물성 맞선 식물성 승리도 부각
<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베크 지음·장소미 옮김/문학동네·1만4800원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베크(53)는 언제나 논쟁을 몰고다닌다. 그의 소설에서 거침없이 표출되는 노골적인 성적 묘사, 이슬람과 여성에 대한 혐오와 모독 등이 논쟁의 핵심이었다. 그가 철학자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주고받은 서간집의 제목마따나 그는 어느 정도는 ‘공공의 적’이었다. 그가 프랑스 최고의 작가 가운데 하나로 꼽히면서도 권위의 공쿠르상과 인연이 닿지 않았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의 2010년 신작 <지도와 영토>는 그에게 마침내(!) 공쿠르상을 안겨 준 작품이다. “어떤 책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문학사에서 중대한 작품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공쿠르상 심사위원인 문학평론가 베르나르 피보의 말은 공쿠르상과 우엘베크의 ‘어정쩡한’ 타협을 상징하는 것처럼 들린다. 작가에게는 수상의 영예를 가져다 준 작품이지만, <지도와 영토>는 우엘베크의 팬들에게는 어쩌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소설이다. 프랑스의 주간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평가를 들어 보자. “우리는 폭탄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것은 유머와 풍자, 멜랑콜리의 불꽃놀이다. 미셸 우엘베크는 더 이상 ‘공공의 적’이 아니다.”
더 이상 공공의 적이 아니라는 말을 우엘베크 자신은 칭찬으로 받아들일까? 모르겠다. <투쟁영역의 확장> <소립자> <어느 섬의 가능성> 같은 이전 소설의 작가 우엘베크라면 그 말을 오히려 모욕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신작 <지도와 영토>의 작가라면? 어쩌면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짐작할 수도 있을 만큼, 신작은 우엘베크의 이전 소설들과는 다르다. 뭐랄까, 우엘베크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던 독기가 빠졌다고나 할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화가인 제드 마르탱. 지도를 사진으로 찍는 작업(소설 제목은 그의 첫 전시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에서 왔다)으로 일약 미술계의 기린아가 되었던 그는 어느 순간 지도-사진 작업을 그만두고 한동안 침묵기를 거친 다음 이번에는 회화로 방향을 틀어 일련의 ‘직업’ 시리즈로 또다시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는 직업 시리즈 전시회를 끝으로 그림을 중단하고 시골에 틀어박힌다….
소설은 사진과 회화를 넘나드는 제드의 예술적 모색과 성공의 이야기에다 올가와의 연애와 그 종말, 건축업자 출신 아버지의 안락사 같은 부차적인 이야기를 곁들인다. 문화계 인사들의 위선과 가식, 현대 사회에 대한 냉소와 풍자, 그리고 노쇠와 죽음 등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바라보는 우수 어린 시선 등이 소설의 속살을 풍부하게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우엘베크 자신이 거의 실물대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우엘베크는 제드가 자신의 직업 시리즈 전시회 도록의 발문 필자로 접촉하면서 소설 속 주민으로 편입된다. “불콰한 안색에 머리는 헝클어지고 지저분했으며 고약한 냄새가 약간 났다”는 그에 대한 제드의 관찰, 그리고 피카소의 작품을 두고 “통장 잔고가 두둑한 몇몇 육십대들이나 혹할 무지막지한 어리석음과 발기지속증이라도 걸린 듯이 쏟아내는 낙서 같은 그림 나부랭이들뿐”이라 말하는 소설 속 우엘베크에게서는 자신과 타자를 가리지 않는 작가 우엘베크의 신랄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우엘베크가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된다는 설정이다. <누벨 옵세르바퇴르>가 기대했던 ‘폭탄’을 작가가 이런 식으로 터뜨린 것일까. 게다가 사람들이 우엘베크의 사후, “생전에 완강한 무신론을 표방했던 <소립자>의 작가가 육 개월 전 성당에서 은밀히 세례받았음을 알게” 된다는 데에 이르면 그의 자기 풍자와 블랙유머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일한 쟁점을 뽑아내거나 뚜렷한 주제의식으로 요약하기 어려운 소설이지만, 제드가 수십 년 동안 시골에 은둔한 채 몰두했던 마지막 비디오예술의 세계는 인상적이다. 사유지의 땅과 식물들, 컴퓨터 부품을 비롯한 공산품들, 그리고 제드 자신이 평생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사진을 비디오에 담고 그것들을 함께 편집한 작품은 동물과 물건, 인간을 상대로 한 ‘식물의 압승’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이다. “때때로 공산품들은 식물들의 늪에서 표면 위로 떠오르고자 발버둥치다가, 이윽고 수풀과 나뭇잎들의 파도에 삼켜져 식물의 마그마 한복판에 다시 잠기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 화면 속에서 그(=인물) 사진들은 켜켜이 쌓인 식물의 사진들 속으로 빨려드는 듯하더니, 얼마간 발버둥치다가 이내 완전히 묻혀버리고 만다. 이윽고 정적이 흐른다. 오직 바람에 풀들만이 하늘거릴 뿐. 식물의 압승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미셸 우엘베크 지음·장소미 옮김/문학동네·1만4800원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베크(53)는 언제나 논쟁을 몰고다닌다. 그의 소설에서 거침없이 표출되는 노골적인 성적 묘사, 이슬람과 여성에 대한 혐오와 모독 등이 논쟁의 핵심이었다. 그가 철학자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주고받은 서간집의 제목마따나 그는 어느 정도는 ‘공공의 적’이었다. 그가 프랑스 최고의 작가 가운데 하나로 꼽히면서도 권위의 공쿠르상과 인연이 닿지 않았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의 2010년 신작 <지도와 영토>는 그에게 마침내(!) 공쿠르상을 안겨 준 작품이다. “어떤 책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문학사에서 중대한 작품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공쿠르상 심사위원인 문학평론가 베르나르 피보의 말은 공쿠르상과 우엘베크의 ‘어정쩡한’ 타협을 상징하는 것처럼 들린다. 작가에게는 수상의 영예를 가져다 준 작품이지만, <지도와 영토>는 우엘베크의 팬들에게는 어쩌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소설이다. 프랑스의 주간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평가를 들어 보자. “우리는 폭탄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것은 유머와 풍자, 멜랑콜리의 불꽃놀이다. 미셸 우엘베크는 더 이상 ‘공공의 적’이 아니다.”
지도와 영토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우엘베크 자신이 거의 실물대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우엘베크는 제드가 자신의 직업 시리즈 전시회 도록의 발문 필자로 접촉하면서 소설 속 주민으로 편입된다. “불콰한 안색에 머리는 헝클어지고 지저분했으며 고약한 냄새가 약간 났다”는 그에 대한 제드의 관찰, 그리고 피카소의 작품을 두고 “통장 잔고가 두둑한 몇몇 육십대들이나 혹할 무지막지한 어리석음과 발기지속증이라도 걸린 듯이 쏟아내는 낙서 같은 그림 나부랭이들뿐”이라 말하는 소설 속 우엘베크에게서는 자신과 타자를 가리지 않는 작가 우엘베크의 신랄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우엘베크가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된다는 설정이다. <누벨 옵세르바퇴르>가 기대했던 ‘폭탄’을 작가가 이런 식으로 터뜨린 것일까. 게다가 사람들이 우엘베크의 사후, “생전에 완강한 무신론을 표방했던 <소립자>의 작가가 육 개월 전 성당에서 은밀히 세례받았음을 알게” 된다는 데에 이르면 그의 자기 풍자와 블랙유머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일한 쟁점을 뽑아내거나 뚜렷한 주제의식으로 요약하기 어려운 소설이지만, 제드가 수십 년 동안 시골에 은둔한 채 몰두했던 마지막 비디오예술의 세계는 인상적이다. 사유지의 땅과 식물들, 컴퓨터 부품을 비롯한 공산품들, 그리고 제드 자신이 평생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사진을 비디오에 담고 그것들을 함께 편집한 작품은 동물과 물건, 인간을 상대로 한 ‘식물의 압승’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이다. “때때로 공산품들은 식물들의 늪에서 표면 위로 떠오르고자 발버둥치다가, 이윽고 수풀과 나뭇잎들의 파도에 삼켜져 식물의 마그마 한복판에 다시 잠기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 화면 속에서 그(=인물) 사진들은 켜켜이 쌓인 식물의 사진들 속으로 빨려드는 듯하더니, 얼마간 발버둥치다가 이내 완전히 묻혀버리고 만다. 이윽고 정적이 흐른다. 오직 바람에 풀들만이 하늘거릴 뿐. 식물의 압승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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