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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성들의 삶의 무게, 시간이 녹슬면 가벼워질까

등록 2011-12-25 20:06

작가 최진영(30)
작가 최진영(30)
최진영 새 장편 `끝나지 않는 노래’
일제이후 격변기 살아온
눈물의 여성 삼대 이야기
성 이데올로기 힘에 갇혀
세대 모순이 된 비극 담아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으로 지난해 제15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던 작가 최진영(30·사진)이 두 번째 장편소설 <끝나지 않는 노래>(한겨레출판)를 내놓았다.

소설은 “엄마가 두부를 만들다가 낳았다 하여 두자라는 이름을 갖게” 된 1927년생 두자에서부터 시작되어 두자의 쌍둥이 딸인 수선과 봉선, 그리고 다시 그들의 딸인 은하까지 여성 삼대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진행된다. 일제 통치와 태평양전쟁, 해방과 6·25, 이승만과 박정희의 장기 독재, 광주 학살과 구제금융 같은 사회적 사건들이 희미한 배경으로 깔리지만, 그 배경 위로 도드라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성 주인공들의 통한과 눈물의 세월이다.

소설 속 여성 주인공들이 통과해 온 세월이 특별히 강퍅하거나 잔인한 것은 아니었다. 성차별과 억압이 차라리 상식이었던 가부장제 문화에서 그들의 삶은 오히려 평균적인 것에 가깝다. “단 한 번도 어린이인 적이 없었”으며, “온 세상을 통째로 등에 진 듯 무겁고 괴로웠다”는 두자의 삶은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당연한 몫일 뿐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삶의 불구성과 운명의 불합리함을 자각할 때 그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비로소 싹을 틔운다.

“문득 제 인생이 간장 종지에 담긴 까만 간장처럼 여겨졌다. 좁은 세상에 갇혀 그 바깥은 꿈도 꾸지 못하고, 짜고 어둡고 독한 맛이 세상 전부인 줄 알고 살아야만 하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고 감히 어떤 다짐을 내세울 수도 없는 존재.”

그런 각성을 전후해서 몇 개의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한다. 순종적이던 새엄마가 괭이를 휘두르며 아버지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고, 두자 자신은 아들을 낳은 시앗의 역성을 드는 시어머니에게 이불을 집어던진 뒤 집을 나오며, 공장에 취직해서는 결국 ‘아비 없는’ 쌍둥이를 낳는다. 이렇듯 자신을 옥죄는 성적 모순에 나름대로 저항하고 그로부터 탈주하려 시도했던 두자가 두 딸의 어미로서는 또 다시 성차별 이데올로기의 포로로 돌아가는 데에서는 그 이데올로기의 막강한 힘과 아울러서 작가의 냉철한 현실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봉선은 어린 은하를 보며 “야가 우리 나이가 되면 (…) 좀 다를까”라고 수선에게 묻는데, 그 질문에는 기대와 우려가 반반씩 섞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남편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둘이서 은하와 동하 남매를 키우기로 결정할 때 그들은 세상의 변화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다. 아빠 없는 애라고 놀리는 친구들에게 “그렇지만 난 엄마가 둘이야!” 대꾸하라고 시키는 이 ‘엄마들’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가장 이채로우면서도 의미 깊은 설정이다. 두자가 외손녀 은하의 대학 입학을 보며 “세상 많이 좋아졌다고 오랫동안 중얼거”리는 장면은 세상이 그나마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성 삼대의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은하를 결국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성적 불평등과 억압이라기보다는 경제적이며 세대적인 모순이라 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소설은 새벽 고시원에서 불에 갇혀 죽어 가는 은하의 독백과 두자에서부터 은하·동하 남매에 이르는 삼대의 유장한 가계사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삼대의 이야기는 이 젊은 작가가 이야기꾼으로서 만만치 않은 저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게다가 이 이야기꾼의 문장은 품위있으면서도 아름답다. 이런 식이다.

“고인 시간이 녹슬어 뚝뚝 떨어트리는 녹물을 받아먹으며, 쌍둥이는 아무도 모르게, 죄를 감추듯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자라려고 애썼다.”


최진영의 <끝나지 않는 노래>는 문학상 수상작인 첫 소설의 부담을 훌쩍 뛰어넘은 수준작이자 그에 대한 문단의 기대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기 좋게 입증해 준 소설이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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