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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시선

등록 2012-01-15 20:45

문인수 시집 ‘적막소리’
죽음·폐가·노인의 체념…
대상의 목소리 대신 읊는
‘내려가는 것’에 대한 공감
“살처분되는 4대강이 우-우-우- 한꺼번에 몰리는 지하,/ 구제역, 그 역엔/ 깊고 푸른 소가 고였겠다.”(<구제역의 소> 부분)

문인수(67)의 새 시집 <적막 소리>(창비)에서 ‘~겠다’로 끝나는 시구를 찾기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정이나 주장이 아닌 조심스러운 추측의 뜻빛깔을 지니는 이 어미는 잊을 만하면 나와서 시집의 전체적인 기조를 정해 주는 듯하다. 문인수의 시들은 대상을 장악하고 지배하거나 시인 자신의 목소리만을 드높이려 하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사람, 시적 대상의 목소리를 대신 읊는 사람에 가깝다.

“아흔 고개 바라보는 저 할머니/ 오늘도 물질 들어가신다. 좀더 걸어들어가지 않고/ 무릎께가 물결에 건들리자 그 자리에서 철벅,/ 엎드려버리신다. 물밑 미끄러운 너덜을 딛자니 자꾸/ 관절이 시큰거려/ 얼른 안겨/ 편하게 헤엄쳐 가시는 것이겠다.”(<해녀> 첫연)

<해녀>의 인용한 대목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시인의 공감 능력이다. 늙은 해녀가 일찌감치 얕은 물 위로 엎어지는 행위로부터 시인은 그이의 시린 무릎관절을 짐작하고, 더 나아가 생의 수평선을 “넘어, 넘어가야 하리”라는 노인의 체념 섞인 달관을 헤아린다. 이 시집에는 숱한 죽음이 나오고 죽음에 가까운 족속들인 노인들 역시 자주 출몰하지만, <내리막의 힘>이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아마도) 젊은 여성의 실연에 대한 묘사를 통해 공감과 염려의 어떤 경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프라이드는, 끊임없는 파문에 떠밀리는 마른 연잎 같다. 이 연애의 끝자리,/ 그녀가 안전벨트를 맨 채 울먹거릴 때/ 어여쁜 귀고리가 달랑대며 한사코 그녀를 지킨다. 하지만/구겨진 프라이드는 이제 폐차될 것 같다.”(<내리막의 힘> 부분)

폐차 지경에 놓인 프라이드 차종을 모는 운전자 ‘그녀’는 하필 때맞추어 실연을 당했다. 이 시에서 승용차의 폐차와 젊은 여성의 자존심이 입은 상처는 경계 없이 넘나든다. 승용차의 폐차가 자존감의 손상을 대행하는 셈이다. 그러나 “내리막엔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고 싶은 힘이 있다”는 이 시의 마지막 행은 슬픔과 상실이라는 하강 운동이 촉발하는 역설적인 에너지의 생성을 증거한다. 아니, 차라리, 희망한다.

표제시 <적막 소리>에서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 홀로 소주를 마시는 시인은 적막이 빚어낸 소리들을 챙기며 스스로 적막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이 시집에서 그가 여러 사람과 동물의 죽음을 줄기차게 노래하고 고분과 폐가, 간이역처럼 스러져 가는 것들에 애틋한 눈길을 던지는 것은 적막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친연성을 알게 한다.

“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적막도 복받치는 것 넘치느라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무슨 날도 아닌데 산소엘 와서/ 저 소리들 시끄럽다, 거역하지 않는 것은/ 내가 본래 적막이었고 지금 다시/ 적막 속으로 계속 들어가는 중이어서 그런가,”(<적막 소리> 앞부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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