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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트소설 번역 때도 상대방 거 안 읽어요…막힐 때만 묻죠”

등록 2012-03-29 20:33수정 2012-04-02 11:39

일본문학 전문 번역가인 김난주(오른쪽)·양억관 부부가 봄비가 촉촉이 내린 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 자택 주변을 우산을 쓴 채 산책하고 있다.
 고양/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일본문학 전문 번역가인 김난주(오른쪽)·양억관 부부가 봄비가 촉촉이 내린 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 자택 주변을 우산을 쓴 채 산책하고 있다. 고양/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우리는 짝
일본문학 전문 번역
김난주·양억관 부부
“말하기 민망하지만, 저는 인생의 청사진을 가지고 번역가가 된 건 아니었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인생을 치밀하게 계획하던데, 제가 일본어 번역가가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요.”

일본문학 전문 번역가 김난주(53)씨의 말은 뜻밖이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을 비롯해 수많은 일본 소설을 우리말로 옮긴 대표적인 번역가가 그 아닌가.

부창부수랬다고, 마찬가지로 일본문학 번역가인 그의 남편 양억관(56)씨의 설명도 비슷했다. 그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같은 책을 번역한 유명 번역가다.

“저 역시 번역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먹고살 일을 궁리하다가 번역 쪽에 발을 들이밀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게 곧 직업이 되었네요. 허허.”

하루키 등 수백권 우리말로
김씨 작품 ‘산뜻’ 양씨는 ‘묵직’

대표적인 부부 번역가 김난주·양억관씨를 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 자택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경희대 국문과 선후배 사이. 양씨가 76학번이고 김씨가 77학번이다. 대학을 마치고 먼저 국문과 대학원에 입학한 김씨가 당시 신생 학과였던 일문과 조교로 일하게 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대학원을 수료할 즈음 삶의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일문과 교수가 자신의 모교인 일본 도쿄 쇼와여자대 유학을 권유했던 것. 1984년에 도일해서 1년을 청강생으로 지낸 뒤 대학원에 입학해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 뒤 오쓰마여대와 도쿄대에서 공부를 계속하다가 1990년에 귀국했다. 귀국 전해인 1989년에, 자신의 뒤를 좇듯 일본에 와 있던 양억관씨와 결혼하고 첫아이도 낳은 상태였다.

양씨의 일본행도 아내 김씨와 동기가 비슷했다. 마찬가지로 국문과 대학원을 마친 그 역시 김씨의 뒤를 이어 일문과 조교 일을 하다가 그 인연으로 일본으로 향한 것. “그곳이 일본이 아닌 미국일 수도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만큼 우연적인 결정이었다고. 1985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도립대 철학과 대학원 연구생으로 1년을 보낸 뒤 도쿄대를 거쳐 아시아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처음부터 그저 공부를 해 보고 싶었을 뿐 학위를 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1992년 학위 없이 귀국했다.

귀국 뒤가 문제였다. 유학생으로 6~7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두 사람 다 학위를 받아 온 것은 아니었다.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새삼 월급쟁이 생활을 시작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남편이 귀국할 무렵, 아내 김씨는 세 살짜리와 6개월짜리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얹혀사는 처지였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사실 번역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일본에서 돌아온 뒤, 애도 있고 하니까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요. 무슨 일을 할까 궁리하다가 문득 일본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하루키의 소설이 생각나더라구요. 우리말로 잘 옮겨 놓으면 한국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지 않을까 싶었죠.”

그의 첫 번역책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92년이었다. 원고지로 2800여장에 이르는 ‘대작’이었는데, 무작정 번역해 놓은 원고를 대학 후배인 이산하 시인이 출판사에 연결시켜 주었다. 당시만 해도 저작권 계약이 엄밀하지 않을 때였다. 그 뒤 역시 하루키의 소설 <태양의 남쪽 국경의 서쪽>을 하루키 책으로는 처음으로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어 낸 것을 비롯해 주로 일본 현대 소설 번역 의뢰가 들어왔다.

남편 양씨는 번역에서도 아내의 뒤를 따랐다. 학위 없이 귀국한 뒤 먹고살 일을 고민하던 그도 일본에서 자신이 재미있게 읽었던 서양 신비주의 관련서 <어떻게 초감각적 세계의 인식을 획득할 것인가>를 첫 번역서로 삼았다. 역시 대학 후배인 류시화 시인이 출판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 뒤로, 지금은 없어진 고려원을 중심으로 “분야를 불문하고” 번역 의뢰에 응했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일본 현대 소설을 위주로 삼지만, 그 비중과 대상 작가는 조금 다르다. 김씨의 경우 어린이용 이야기와 그림책을 제하면 거의 90%가 소설인 반면, 양씨는 절반 남짓이 소설이다. 어린이책은 거의 하지 않는다. “소설을 20~30%만 하고 나머지가 인문서라면 번역자로서 행복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고 그는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양씨가 지금까지 200권을 훌쩍 넘게 번역했고, 김씨 역시 성인물 200권 남짓에 어린이용 책이 따로 200권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김씨의 번역이 매우 감성적이고 산뜻한 반면, 양씨의 번역은 묵직하다는 것이 중평이다. 출판사들은 대체로 그런 두 사람의 스타일에 맞는 책들을 번역 의뢰한다.

부부가 같은 일본어 번역가이기 때문에 같은 책을 나눠 하거나 심지어 출판사 쪽에서 부부를 구분하지 않고 번역 의뢰를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짐작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고 부부는 강조했다. “서로가 상대방이 하는 작업을 알지 못한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았다. 부인이 집에서 일을 하는 반면 남편은 일산에 따로 마련한 작업실로 출퇴근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집에서 나란히 작업을 한 적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불편해서 한쪽이 ‘독립’했단다.

그럼에도 적잖은 독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부부의 유명한 ‘협업’ 사례도 있다. 쓰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한 권씩 나눠 쓴 <냉정과 열정 사이>, 그리고 <좌안> <우안>의 경우다. 남녀 주인공의 시점에서 같은 이야기를 나눠 쓴 원작 소설들의 방식에 어울리게, 부부 번역가도 이 세트 소설들을 한 권씩 나누어 번역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같은 세트 소설인데도 상대방이 번역한 건 서로가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양)

“맞아요. 물론, 번역을 위해 필요한 사항은 서로 확인했지만, 그런 최소한의 절차를 빼고는 상대방의 책을 읽진 않았어요.”(김)

독자들로서는 약간 김이 빠지는 말일 수도 있겠다.

남편은
답이 안나와 머리 쥐어짤때
의외로 쉽게 해결책 내줘요

아내는
어린이책 할 땐 대폭 고쳐줘
옆에 있는 게 믿음직스럽죠

“<좌안> <우안> 땐 더했어요. 서로 상대방의 번역 원고를 안 읽었는데, 나중에 보니 같은 장면에서 남녀 주인공이 대화하는 걸 편집자가 똑같게 만들어 놨더라구요. 원작에서도 조금씩 달리 표현돼 있었던 거거든요. 남녀 주인공의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죠. 편집자에게 얘기해서 다시 원래대로 고쳤어요.”(김)

그만큼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부부가 같은 분야의 일을 하는 데서 오는 장점은 분명히 있지 않을까.

“아무리 어학 실력이 뛰어나도 번역을 하다 보면 이상하게 막히는 대목이 생길 수 있어요. 정말 머리를 쥐어짜내고 자료를 찾아봐도 답이 안 나올 때, 양억관씨한테 물어보면 의외로 쉽게 답을 내주는 경우가 있지요.”(김)

“정말이지 별거 아닌데 마가 낀 것처럼 답이 안 나올 때가 있죠. 그럴 때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정말 쉽게 답이 나오거든요. 그런 문제를 물어볼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게 믿음직스럽죠.”(양)

이런 일도 있었다. 어린이물에 거의 손을 대지 않는 양씨가 어쩌다 야구에 관련된 어린이책을 번역하게 되었다. 평소 하던 대로 번역을 마쳤는데, 김난주씨가 원고를 보더니 대폭 고쳤다.

“거의 다 뜯어고쳤죠. 아이들 책에는 그에 어울리는 말투가 있는 거거든요. 의성어나 의태어를 풍부하게 구사해야 하고, 점층법이나 점강법 식으로 말의 리듬도 살려야 하구요. 야구 용어를 설명하는 수식어도 좀더 아이스럽게 고쳤어요.”(김)

“김난주씨가 고친 걸 보니까 제 얼굴이 화끈거리더라구요. 제가 한 걸 그대로 보냈으면 편집자들한테 욕깨나 먹었을 거예요. 반대로 김난주씨가 야구 용어를 번역하다가 저한테 물어보는 경우도 있는데, 아주 간단한 규칙을 몰라서 헤매던 거였어요.”(양)

김씨는 요즘 나카가미 겐지의 단편집 <십팔세, 바다로>를 번역하고 있다. 늘 하는 에쿠니 가오리와 요시모토 바나나도 올해 각각 두어 권씩 낼 예정이고, 그밖에도 추리소설과 어린이책, 그리고 리바이벌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에세이 세 권도 올해 나올 목록에 들어 있다. 양씨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니자키 준이치로 소설 여섯 권도 예정돼 있고, 그밖에 직장생활의 애환을 다룬 샐러리맨 소설도 나오기로 되어 있다. 하고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는 언제나 괴리가 있게 마련이다. “두세 권이라도 좋으니 인문 고전과 불교 관련서를 번역하고 싶다”는 게 양씨의 바람이고, “가령 ‘김난주가 선정한 일본 근대문학 10선’을 내고 싶다”는 게 김씨의 꿈이다.

김난주가 뽑은 ‘내 번역’
김난주가 뽑은 ‘내 번역’
양억관이 뽑은 ‘내 번역’
양억관이 뽑은 ‘내 번역’
김씨가 명지대 사회교육원과 가톨릭대 등에서 번역 강의를 오랫동안 하다가 지금은 쉬고 있는 반면 양씨는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번역 강의를 하고 있다. 두 사람에게, 번역가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마지막으로 청했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라는 당부를 하고 싶어요. 또 가능하면 자신의 ‘전공’ 분야를 정해 놓고 10년 정도 꾸준히 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일본어 번역가라 할지라도 영어나 중국어 같은 다른 외국어도 몇 개 더 익혀 놓으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양)

“우리말의 감각과 우리말에 대한 애정을 강조하고 싶네요. 물론 원어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번역의 마지막 관건은 정확하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표현해 내는 능력이거든요. 우리말에 깨어 있는 감각이 중요합니다.”(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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