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
박홍규 지음. 필맥 펴냄. 1만원
박홍규 지음. 필맥 펴냄. 1만원
소크라테스 ‘철인 왕’ 주장은 반민주적
500명 시민의 민중법정이 사형 판결 내려
속빈 강정으로 남은 민주주의의 희망은
법전 달달 외운 ‘전문가 바보들’이 아니라
교양 지닌 아마추어 시민들에게서 나온다
500명 시민의 민중법정이 사형 판결 내려
속빈 강정으로 남은 민주주의의 희망은
법전 달달 외운 ‘전문가 바보들’이 아니라
교양 지닌 아마추어 시민들에게서 나온다
“나는 이 책에서 매우 일반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소크라테스를 변론하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 민주주의를 변론하고자 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소크라테스와 결별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아버지로 섬기는 철학과 결별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그리스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그 민주주의를 신봉한 그리스 사람들을 변호하기 위해 이 책을 쓰는 것이다.”
다방면에 걸쳐 독특한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주류적 가치를 신랄하게 비판해온 박홍규 교수는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 제1장에서 이처럼 집필동기를 딱부러지게 밝혔다. 그는 그리스를 직접 찾아보고, 1974년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속빈 강정으로 남아 있는 ‘민주주의가 아름다운 나라(엘리니케 데모크라티아·그리스의 정식 국명)’의 삭막한 민주주의 풍경에 착잡해한다. 그런데 책 곳곳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얘기들은 그 출발점이 그리스가 아니라 이 땅의 민주주의요 소크라테스들임을 짐작케 한다.
“민주주의의 장전인 헌법을 배우는 법대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는커녕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엘리트주의에 젖어 소위 육법당이라고 하는 독재군인과 결탁하거나 그 하수인이 되어 군사독재의 중심세력이 됐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나는 지난 26년간 법대에서 법을 가르쳐왔는데… 나머지 99%는 그 험악했던 세월인 1970-90년대에 잔혹한 권력에 대해 한치의 회의도 하지 않고 권력자가 되는 길의 하나인 사법시험에 매진했다.” “우리는 학생들을 오직 성적순으로 뽑는다. …법대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성적이 우수하다. …그런 아이들이 싫다. …그런 아이들이 10년 정도 세상일에는 철저히 눈을 감고 오로지 이기적인 심성으로 법전과 교과서를 달달 외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몇년 뒤 판검사가 됐을 때 훌륭한 재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사람들을 ‘전문가 바보’라고 부른다. 나는 그들을 결코 교양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양인 되길 거부한 소크라테스
“대학 1학년 때 한 동급생이 북한방송을 들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걸려 재판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교양학부장인 철학교수가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해 그 학생을 공산주의자라고 증언했다. 분노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농성을 벌이고 그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는 사퇴했고, 재판을 받은 학생은 무죄로 풀려났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981년에 나는 그 대학 전임교수를 뽑는 심사에서 최종후보로 올라갔다. 그런데 바로 그 교수가 다시 복직해서 교무처장이 돼 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10년이 더 지난 1991년에야… 겨우 그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지금도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대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요컨대 대학은 노예제 사회다.” “주로 출신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파벌싸움에서 총장을 낸 파벌은 4년 동안 대학의 모든 학사운영에서 중심이 된다. 특히 보직행상이 오가고, 연구비를 비롯한 돈의 분배도 달라진다. 자리와 돈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을 품고 와신상담하며 총장을 낸 파벌에 대항할 파벌을 키운다. 이런 연유로 대학은 완전히 선거운동판에 빠져버렸다.” 어디 법조계와 대학만 그런가? 매일 보고 듣는 언론과 정치판 사정은 다른가?
이런 절망이 저자의 발길을 그리스로 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인용한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의 일절은 이렇다. “교양은 의사소통을 어렵게 해서는 안 되며, 풍성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교양은 억압적 표준, 불쾌한 과제, 경쟁의 형식, 심지어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려는 교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양은 인간 상호 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의 양식이다.” 저자가 보기에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바로 교양인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교양인이 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전문가가 되고, 그들 전문가를 철학전문가인 ‘철인 왕’ ‘철인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이상국가로 그렸다. 그는 노예제를 지지하고 대중을 경멸했다. 저 유명한 ‘대화술(문답법)’은 자신의 속내는 밝히지 않고 상대방 말꼬리만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검찰이나 경찰식 수사 또는 변호사식 증인심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제자와 지지자들은 대체로 귀족 등 지배그룹의 일원이거나 엘리트, 권력자들이었다. 그는 스파르타 예찬자였으며, 한때 민주주의를 무너뜨렸던 30인 독재정권 시절의 수령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의 옛 제자였고, 그를 민중법정에 고발하는데 앞장섰던 아니토스는 30인 정권에 맞서싸워 민주정을 회복시킨 사람이었다.
교양을 토대로 한 도시국가(폴리스) 시민들의 아마추어리즘(전문지식이 아니라 교양을 지닌 시민이라면 누구나 정치에 참여해 추첨으로 단임제의 공직에 취임하고 돌아가며 의장을 맡았다)이 만들어낸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와 소크라테스식 프로페셔널리즘을 토대로 한 반민주주의의 대립과 사생결단.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500명의 폴리스 시민이 참여한 민중법정,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민주주의 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게 된 배경이었다. 민주주의가 죽느냐, 소크라테스가 죽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소크라테스 연구수준은 다음과 같은 전문가의 해설처럼 여전히 한심하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한 철학자의 일생에 걸친 철학적 작업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몰지각과 부질없는 시기심, 그리고 당대 아테네의 정치지도자들의 이기적 적대심이 영합하여 빚은 어이없는 결말이었던 셈이다.” 그리스 시민들은 결코 무지나 시기심 때문에 그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게 아니다.
2400년 계속된 반민주의 승리
그럼에도 이후 2400여년의 역사는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주의의 승리로 이어졌다. 세계를 지배한 것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전문가들이었고 그들은 그리스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로 매도하고 소크라테스를 철학과 진리의 순교자로 조작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소크라테스로부터 유럽의 허무주의가 시작됐다고 설파했다.
희망은 ‘전문가 바보들’이 아니라 교양을 지닌 자유롭고 평등한 ‘아마추어’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확립에서 찾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를 지금 다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엘리트 전문가주의를 지향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 등은 대중적 교양인의 아마추어리즘에 토대를 둔 그리스 민주주의파와 대립했으며, 그것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그림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중 플라톤(왼쪽)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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