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사진)의 새 장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모음)은 친어머니를 찾고자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입양아 카밀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입양되기 직전 친어머니와 함께 찍은 24년 전의 사진 한 장을 들고 카밀라가 찾은 곳은 남쪽 항구도시 진남. 친모는 그곳 진남여고에 다니던 열일곱 살 나이에 카밀라를 낳았다고 했다.
자신의 입양 직후 친모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카밀라의 추적은 아비 찾기로 방향을 튼다. 그 과정에서 카밀라는 저마다의 ‘진실’을 주장하는 여러 인물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친모 정지은이 다녔던 진남여고 교장 신혜숙, 엄마의 학교 친구였던 김미옥, 도서반 지도교사였던 최성식 등이 그들이다. 그들의 말에 따라 카밀라의 아버지는 지은의 친오빠였다가 최성식 선생님이었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인물로 거듭 정체를 바꾼다. 작가는 카밀라 자신은 물론 독자들의 의표를 찌르는 뜻밖의 결말로 나아가기 전까지 차례로 그럴듯한 ‘오답’을 제시하면서 진실의 공표를 계속 늦춘다. 결정적인 패를 손에 쥔 채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는 노련한 도박꾼처럼.
친아버지의 정체를 좇는 취재와 추론은 이 소설에 추리소설적 긴장을 불어넣는데, 그렇다고 해서 결말부가 독자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해소해 주는 것도 아니다. 독자는 안개 속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듯 작가가 제공한 최소한의 힌트를 근거 삼아 스스로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 책 뒤에 붙인 ‘작가의 말’은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이라는 문장으로 끝나는데, 그것은 독자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독서 행위에 대한 작가 쪽의 주문으로 읽힌다.
카밀라의 입양, 그리고 그에 따른 지은의 자살을 초래한 것은 이 불행하고 어린 모녀를 둘러싼 추문들이었다. 그리고 그에 앞서 대형 조선소 노동자였다가 쟁의 과정에서 죽은 지은 아버지와 동료들의 죽음이라는 ‘원죄’가 있었다. 자신이 주도한 쟁의를 당국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동료 노동자들이 희생되자 지은 아비는 타워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다가 결국 바닥으로 몸을 던진다. 이 비극적인 사태는 함께 죽음을 맞은 동료 노동자들의 딸이자 그들 자신 친구지간인 지은과 미옥 사이에 지옥(=지은+미옥?) 같은 심연을 파게 되고 그것은 결국 지은의 죽음이라는 또 다른 파국으로 이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지은 및 미옥의 학교 친구로서 영화감독이 된 유진은 심연이라는 자신의 영화적 주제가 고교 시절 보고 겪은 지은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노라고 고백한다. 이 말은 책 뒤의 ‘작가의 말’에서 거의 동일하게 되풀이되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 낙관의 근거를 찾아보자면 ‘희망’이 그 근거가 될 법하다. 타워크레인 위의 아버지를 향해 지은 오누이가 랜턴 불빛으로 보낸 모스 신호가 ‘희망’이었다. 소설에는 또 에밀리 디킨슨의 시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이라는 시가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첫 연은 이러하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에 둥지를 틀고/ 말이 없는 노래를 부른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를,”
아마도 디킨슨의 시에서 자극을 받은 듯 지은 자신 도서반 문집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하며 그 시들은 등대 불빛처럼 카밀라의 아비 찾기를 인도한다. 무엇보다 소설 제목이 된, 죽은 지은의 영혼이 카밀라에게 건네는 이런 말이야말로 ‘희망의 시’가 아니겠는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글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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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신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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