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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람이 안보이니 죽음이 보이네

등록 2012-10-28 20:01

김기택
김기택
김기택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
사물과 신체기관 처지에서 서술
감정을 배제해 시적 효과 극대화
죽음 포착한 생생한 묘사 압도적
“세상 불안해하는 딸 보며 쓴 시”
김기택(사진)의 여섯 번째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에서는 두 가지 기법이 두드러진다. 사람이 아닌 사물이나 추상적 개념, 또는 신체 일부의 처지에서 사태를 기술하는 방법, 그리고 반복 내지는 점층적 서술이 그것이다.

“목뼈가 으스러지도록 넥타이가 목을 껴안는다/ 목이 제 안에 깊숙이 넥타이를 잡아당긴다/ 넥타이에 괄약근이 생긴다// 발버둥치는 몸무게가 넥타이로 그네를 탄다/ 다리가 차낸 허공이 빙빙 돈다”(<넥타이> 부분)

“입은 벌써 벌어졌는데/ 목젖은 팽창하여 말이 나갈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입술은 오물거리고 혀는 구불거리고 이빨은 공기를 끊어/ 이미 발음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머리에서는 나와야 할 문장이 익어가는데/ 팔과 손가락은 허공을 섬세하게 주물러/ 말에 알맞은 제스처를 잘 반죽해놓았는데// 아직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말더듬이> 부분)

천장에 매단 넥타이에 목을 매 자살하는 사람을 묘사한 <넥타이>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목뼈와 목, 몸무게, 허공 같은 것들의 능동적인 움직임의 결과로 그려진다. 자살을 결심하고 넥타이를 준비해서 실제로 결행하기까지 인간의 주체적 판단과 행동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말더듬이>에서도 말을 내뱉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는 끊임없이 연기되며 좌절을 겪는 반면, 입과 목젖, 입술, 이빨, 머리, 팔, 손가락 같은 부속 기관들의 움직임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두 작품에서 공히 감정을 배제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묘사가 시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 부딪쳐 멈춰버린 순간에도 바퀴를 다해 달리며/ 온몸으로 트럭에 붙은 차체를 밀고 있다./(…)/ 아직 다 달리지 못한 속도가/ 쪼그라든 차체를 더 납작하게 압축시키며 달리고 있다./ 다 짓이겨졌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속도가/ 거의 없어진 차의 형체를 마저 지우며 달리고 있다./(…)/ 속도는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고속도로 4> 부분)

과속에 따른 교통사고를 다룬 이 시에서도 주인공 자리는 어디까지나 ‘속도’라는 추상의 개념이 차지하며,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았을 사람은 실종되기라도 한 양 보이지 않는다. 도시와 문명의 광폭한 속도에 대한 거부감은 시인의 지난 시집 <껌>에 이어지는 것인데, 이번 시집에서도 <손톱>과 <금단증상> 같은 작품이 속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반면, 노인을 등장시킨 <국수행 전철에서>나 늙은 개의 처지에 눈길을 준 <늙은 개 1>과 <늙은 개 2> 등에서는 “고집스럽게 한자리에만 앉아 늙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 시간”(<국수행 전철에서>)에 대한 무료함과 적대감이 엿보인다.

김기택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
김기택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문학 행사/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얼굴들/ 늘 뚫려 있어서 심심한 구멍들을 채우느라/ 괜히 비운 밥그릇과 술잔 들// 이토록 먼 곳까지 왔으니/ 시인으로서 뭔가는 남겨야 하겠기에/ 문학적인 체취가 은은하게 묻어나는 사인처럼/ 정성껏 남기고 온 똥오줌”(<나는 바퀴를 보면 안 굴리고 싶어진다> 부분)

시인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은 인용시에서처럼 쓴웃음에 가까운 유머감각을 선보인 시들도 없지 않지만, 이번 시집에서 압도적인 것은 죽음의 생생한 묘사들이다. <넥타이>뿐만 아니라 <목을 조르는 스타킹에게 애원함> <여친 어머니 살해사건> <그녀가 죽었을 때> 같은 시들에서 독자는 죽음의 순간으로 들어가 그 죽음을 직접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시인은 “올해 고교 3학년인 딸아이가 끔찍한 성폭행과 살인사건이 날 때마다 바로 옆집에서 일이 벌어진 것처럼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 이런 시들이 집중적으로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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