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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시인 고은, 젊은 고은을 회고하다…“과거는 나의 어머니”

등록 2013-01-07 20:20

고은 시인(80)
고은 시인(80)
‘바람의 사상’ ‘두 세기의 달빛’ 출간
70년대 일기와 6·25 이전 삶 정리
글·행동으로 독재 맞선 일화 생생
김현·이문구 등 당대 문인 풍경도
새해 벽두에 고은 시인(80·사진)이 자전 산문 두 권을 한꺼번에 내놓았다. 1970년대 일기를 모은 <바람의 사상>과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이상 한길사 펴냄)이 그것이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인 <바람의 사상>에는 1973년 4월부터 1977년 4월까지 4년 동안 쓴 일기가 묶였고, 후배 작가 김형수(54)씨와 나눈 대담을 엮은 <두 세기의 달빛>에서는 1930년대 유년기에서 6·25 전쟁까지의 초기 생애가 회고된다.

“한 인간의 생애는 인류사의 긴 과정을 요약하고 있기도 할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저는 일기 쓰는 걸 경멸하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반드시 몇 자를 적어야 하루를 마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삶이란 세월의 소비에 지나지 않을 것인데, 대화와 기록이라는 이런 생산 행위로 내가 한 소비의 일부나마 탕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일 낮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마련한 고은 시인은 “앞으로도 대화와 기록은 숨을 쉬는 한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월간 <문학사상>을 비롯한 잡지들에 일부가 연재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고은 시인의 일기는 박정희 유신 통치의 폭압이 광기로 치닫던 70년대 중후반의 암울한 사회 분위기, 그 안에서 역사와 현실에 눈뜨고 글과 행동으로 독재 정권에 맞서던 시인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령 1974년 10월23일의 일기에서 그는 이른바 순수문학에서 참여문학으로 자신을 바뀌게 만든 것이 시대와 사회 현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한다.

“나 같은 순수 시인을 참여 시인으로 만들 것인가. 이 군인의 시대, 이 육군의 시대야. 이 총검의 시대야. 이 탱크의 시대야. 이 색안경의 시대야.”

또 이틀 뒤인 25일의 일기에서는 ‘거리’에 나서야 할 자신의 운명을 담대하게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제 나는 거리에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다른 운명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너라 오너라, 그 어떤 파도 덩어리라도 오너라. 내가 너에게 파묻히겠다.”

“한 인간 생애는 인류사의 요약
세월을 소비하며 살아온 내 삶
숨쉬는 한 대화하고 기록할 것”

같은 해 11월18일, 지금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낳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을 전후한 급박한 상황 전개도 흥미롭다. 고은 시인은 평론가 백낙청 염무웅, 작가 박태순 이문구 등과 논의를 주도했는데, 작가 김동리가 발행인으로 있고 이문구가 편집장을 맡았던 서울 청진동 한국문학사 사무실을 회합 및 실무 집행 공간으로 활용했다. 방 주인 격인 김동리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 준다는 것을 눈치채고 고은 시인은 “김동리가 고맙다”고 쓴다.(11월17일) 반면, 거사 당일인 18일 아침 서울 광화문 의사빌딩 현관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다가 경찰들에 의해 들어 올려져 붙잡혀 가는 자신을 보고 마침 근처를 지나던 평론가 조연현은 “영웅 고은씨의 날이군”이라 조롱했다고 그는 기록했다.

“1975년. 올해는 내 문학 생활이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원고 받을 곳도 없을 것이다. 잡지사나 출판사도 압력을 받을 것이다. 서점도 압력을 받을 것이다. 그 어디서도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올해 나는 고문, 구속, 연금, 감시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노예의 연대기는 없다.”

해방 30주년이던 1975년 1월1일치 일기는 문인으로서나 시민으로서 가시밭길이 예상되는 한 해를 맞는 비장한 감회와 각오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밝힌 감회와 각오는 1975년 한 해에 그치지 않고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까지도 이어질 기나긴 고난과 시련을 예고하고 있다 하겠다.

시인의 70년대 일기는 폭압적인 정권을 상대로 한 싸움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가 교유한 문인과 문화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한 당대의 문화계 풍경 역시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그의 일기에는 작고한 평론가 김현과 소설가 이문구, 민음사 대표 박맹호, 소설가 최인훈과 평론가 김윤식, 그보다 앞선 세대인 서정주·김동리·구상, 그리고 리영희·한승헌·임재경·남재희 등 언론인과 법조인 등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고은 시인은 “내 정신의 본적지가 50년대의 폐허라면, 실제로 내가 살아 숨쉬기 시작한 또 하나의 고향은 70년대”라며 “멀고 아득해 보이기만 하는 70년대의 문화적 진실을 지금의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일기를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고 말했다.

“과거란 현재를 풍부하게 해 주는 나의 어머니이자 대륙이고 이데아입니다. 거대담론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미시의 가치도 무척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정치 분야의 삶의 궤적과 화석이 우리를 얼마나 풍요하게 하는지요. 그런 의미에서 과거란 누구나 하나씩은 가져야 할 마음속의 풍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편 고은 시인은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드러난 사실은 우리 사회가 두 쪽으로 극심하게 갈라져 있다는 것”이라며 “정치 지도자들은 구호로서 사회통합을 말하지만, 이 말은 그 물질적·정신적 기반을 먼저 갖춘 뒤에 사후적으로 나와야 할 명제”라고 말했다. 그는 “올 상반기에 이탈리아 베네치아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한 학기를 체류할 예정이며, 5월엔 남아공에서 유럽 시인 몇과 함께 소규모로 열리는 특별한 시 축제에 참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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