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48)의 세 번째 소설집 <숲의 대화>(은행나무)에는 유난히 세 사람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 많다. 작가가 의도하거나 의식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수록작들의 이야기가 위기나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대체로 화합과 희망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숫자 ‘3’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홀수이자 소수이기도 한 ‘3’은 안정과 조화의 느낌을 수반한다. 한자어 ‘정립’(鼎立)과 공자의 ‘삼인행’, 변증법의 정반합 같은 것들을 보라. 둘 사이의 갈등과 불화를 매개하고 조정함으로써 화해로 이끄는 구실을 숫자 ‘3’은 하는 것 같다.
“이러고 있으니 좋은가?”
표제작에서 극노인 운학은 잣나무숲 바위 어름에 묻힌 아내 순심의 유골을 향해 묻는다. 한재 잣나무숲의 열십자 모양 바위 주변에 자신의 유골을 뿌려 달라는 것이 아내의 유언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운학의 내부에서는 “거무죽죽 다 죽어가던 심장이 벌떡 살아나 타닥타닥 시퍼런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까닭이 없지 않다. 그곳은 전쟁통에 ‘도련님’과 함께 빨치산으로 입산했던 순심이 다름 아닌 도련님에게 등 떠밀려 하산한 곳이자 그 얼마 뒤 도련님 자신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한 것. 도련님의 아이를 뱃속에 지닌 채 자신의 방으로 숨어든 순심을 운학은 평생 동안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건만, 순심의 마음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도련님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소설은 아내가 묻힌 숲에 찾아간 늙은 운학이 젊은 도련님과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60년 세월을 지나온 회한은 한 줄기 바람으로 숲을 떠돌 따름이다.
“바람이 잣나무숲에 고인 어떤 것들의 세월을 소환하여 거기 숨을 불어넣는다.”
<혜화동 로터리>에도 빨치산 출신이 등장한다. 만석꾼의 자식으로 빨치산이 된 ‘최’, 미군의 북파 공작 첩보부대인 켈로부대 출신 ‘박’, 그리고 이들보다 연배가 좀 낮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 ‘김’이 혜화동 로터리를 배회한다. 서로를 ‘삼류 빨치산’ ‘삼류 켈로’라 허물없이 비웃으면서도 반세기 남짓 둘도 없게 가까운 친구로 지내는 박과 최, 그리고 그들의 구박과 변덕을 받아 주며 반세기 넘게 술시중을 들고 있는 김이 구현하는 삼인행에는 세월의 파도에 둥글게 씻긴 몽돌의 부드러움이 엿보인다.
“박과 최가 떠난 자리, 제 몸뚱이보다 더 무거운 한 삶을 지고 그 삶에 짓눌려 허덕이던 그들의 무게 따위 존재도 하지 않았던 듯, 거리는 평온하다.”
<봄날 오후, 과부 셋> 역시 제목처럼 홀몸인 세 여성을 등장시킨다. 일제강점기였던 어릴 적 이름대로 서로를 ‘에이꼬’ ‘하루꼬’ ‘사다꼬’로 부르는 노파들이다. 부모 이야기를 다룬 소설 <빨치산의 딸>로 글쓰기를 시작한 작가답게 이 작품에서도 사다꼬는 남편과 함께 빨치산으로 입산했다가 산에서 남편을 잃고 자신은 감옥살이까지 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것도 벌써 수십 년 저쪽 이야기. 이제는 거동이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가벼운 치매증세가 찾아오기도 한 노년의 세 친구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이나마 재미지게 살다 가겠노라고 야무지게 다짐한다. “죽긴 왜 죽어! 하루라도 더 재미나게 살아야지.”
<목욕 가는 날>은 늙고 노쇠한 어머니를 모시고 목욕탕에 가는 중년의 두 딸 이야기다. 고향 전라도와 서울로 떨어져 살며 그 거리만큼 성격도 판이한 언니와 동생이 모처럼 목욕탕에서 어머니의 등을 밀면서 서로에 대한 오해도 씻고 자신의 과오도 반성한다. 목욕탕이라는 벌거벗은 공간에서 세 사람의 성격과 그 장단점, 각자의 치부는 가차없이 까발려진다.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오늘은 어머니도 나도 언니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칠순은 물론 팔순을 넘나드는 노인들이 주로 등장하며 구수한 전라도 입말이 생생하게 구사된다는 것이 인용한 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징들이다. 나머지 작품들에서도 중증장애(<천국의 열쇠> <브라보, 럭키 라이프>)와 결혼 이주민(<천국의 열쇠> <핏줄>), 가정폭력(<천국의 열쇠>), 노숙자(<절정>)처럼 힘겨운 처지에 놓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여기에서도 작가는 미약하나마 끈질긴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고자 안간힘을 다한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은행나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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