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1906~1975)
‘탄생성’ 개념 만든 철학자 아렌트
전체주의의 ‘악’ 극복할 대안으로
자애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 강조
전체주의의 ‘악’ 극복할 대안으로
자애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 강조
한나 아렌트 지음, 조안나 스코트, 주디스 스타크 편집, 서유경 옮김/텍스트·2만원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행위 전통 인물
홍원표 지음/인간사랑·2만5000원 ‘악의 평범성’ 문제를 제기하며 전체주의의 본질을 날카롭게 짚었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사진)의 초기 저작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번역됐다. 때마침 아렌트 연구자인 홍원표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도 출간돼, 초기 저작과 함께 그의 사유를 전반적으로 짚어볼 계기를 제공한다. <사랑 개념…>은 아렌트가 192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카를 야스퍼스(1883~1969)의 지도로 쓴 박사학위 논문을 엮은 것이다. 그의 정신적 여정은 현상학·실존철학이 주름잡던 1920년대 독일 철학으로부터 출발했다. 당시 독일 지성계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키르케고르 같은 기독교 사상가들은 ‘인기 주제’로 통했다. 아렌트는 1924년 마부르크 대학에 진학해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연인으로서도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유부남 하이데거와의 연인관계로 인한 갈등 때문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옮겨 현상학을 창시한 에드문트 후설(1859~1938) 아래서 반 년 동안 공부했고, 야스퍼스가 있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논문을 쓰게 된다. 아렌트는 1933년 나치 집권을 피해 독일을 떠날 때, 엉망이 된 이 논문의 원고를 들고 나왔다. 프랑스에서 7년 동안 머물다 1941년 미국으로 영구 망명할 때에도 이 원고를 가지고 갔다. 미국에 정착한 아렌트가 1950~60년대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등 전체주의에 대적한 저작들을 펴낼 당시에도, 그는 이 논문을 계속 고치고 편집하길 그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논문은 그가 1975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미출간 상태로 남아 있다가, 아렌트 연구자인 조안나 스코트와 주디스 스타크가 영역본을 찾아내 1996년에 책으로 펴냈다. <사랑 개념…>은 5세기 기독교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를 20세기 실존주의의 프리즘으로 재검토한 저작이다.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경험한 뒤 이를 이겨낼 사유의 재료를 찾으려고 골몰했던 ‘오래된 광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편집자들은 “50~60년대 아렌트의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작업의 수면 아래에는 ‘공적 세계’를 파괴한 전체주의와 공적 세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라는 대결구도가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홍원표 교수도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에서 이 책을 둘러싼 의미에 대해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악을 경험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서 사랑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며, 이는 세계사랑이라는 공적 유대를 밝히는 기초가 됐다”고 평가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갈망하는 욕구’라고 보고, 영원을 추구하는 올바른 사랑인 ‘자애’와 자기 소멸을 좇는 잘못된 사랑인 ‘탐욕’을 구분했다. 그러나 필멸하는 존재로서 시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에게, 영원불멸하는 절대적 선에 대한 갈망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아렌트는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에 담긴 모순과 이중적 의미를 파고들어가며, ‘이웃사랑’에 담긴 실존적 의미를 구체화시키려 했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탄생성’의 개념이다. 하이데거로부터 시간에 대한 탐구를, 야스퍼스로부터 공간에 대한 천착을 전해받은 아렌트는 ‘자신이 창조되었다’는 과거를 기억하고 가능성을 품고 있을지 모를 미래를 기대해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처지를 실존에 대한 근거로 주목했다. 필멸성에 갇히지 않고, 무엇인가 시작할 수 있는 인간 행위를 실존의 근거로 본 것이다. “인간이 창조되었기에 하나의 시발점이 수립되었다”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서 출발한 이 개념은 전체주의와 정면으로 대적한 아렌트의 후기 저작들에도 지속적인 줄기가 됐다. 홍 교수는 “아렌트는 사랑과 시작(탄생성)의 연계성을 강조했지만, 전체주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 시작 능력을 원천적으로 부정했다”고 짚었다. 이런 측면은 책의 배후에 있는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논쟁’이란 맥락도 드러내어준다. 편집자들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아렌트의 쟁점은 하이데거의 ‘무의지’ 가정에 관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일상인(das man)의 습관화된 황폐를 말하는 데 대해 아렌트는 개인의 자애에 의거한 자유로운 선택을 제기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피조물의 필멸성을 압도적인 조건으로 이해했던 하이데거와 다르게, 아렌트는 피조물이 행위를 통해 창조주와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 모색했다는 것이다. 최원형 기자circle@hani.co.kr,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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