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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나무·풀꽃 동무삼은 시인의 산골생활

등록 2013-02-22 20:07

스님, 메리크리스마스
박남준 지음
한겨레출판·1만2000원
달력이 없어도 그의 곁엔 ‘때’를 일러주는 것투성이다.

마당에 복수초 꽃대가 올라오면 겨울이 물러감을 안다. 복수초꽃 피어나면 노루귀꽃이 올라오고, 뒤이어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린다. 여름은 파초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상상하며 부추국수를 말아 먹는 때다. 가을은 붉은 곶감들이 처마에 매달려 몸의 부피를 줄여가는 시절이며, 겨울은 가마솥에서 보글보글 호박죽이 끓는 계절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마당에 씨 뿌리고 벌레 잡고 차를 덖는 시인 박남준에게, 산골마을 양철지붕집은 “해와 달이 놀러 와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넓다.

그의 산문집 <스님, 메리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단연 “나무, 풀꽃, 벌레, 새”다. 하지만, 간간이 등장하는 이웃사람들은 지리산처럼 마음 품새가 넓다. 목욕동무인 옻칠공예가는 교통사고 뒤 앉은뱅이 책상에 앉을 수 없게 된 시인을 위해 손수 책상을 만들어준다. 동네밴드 연습공간을 만들자고 의견이 모이자 사람들은 땅을 내놓겠다, 일꾼들 밥을 해준다며 번쩍번쩍 손을 든다.

아무리 시인이라 해도 산골짝에 혼자 사는 게 어찌 즐겁기만 할까. 암수가 함께 열매 맺는 은행나무를 살짝 질투하는 모습이 잠시 외롭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인도 사상가 비노바 바베를 떠올린다. 바베는 “홀로 걸어라, 오, 너 지극히 행복한 이여, 홀로 걸어라”라며 ‘머물지 않는 강물’로 걸어갔다고 한다. ‘홀로 사는 것’은 ‘홀로 걷는 것’이다. 그래서 바베가 “야, 너 홀로 사는 녀석아, 그만하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박 시인은 냉큼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하지만 시절의 수상함은 10년 넘게 산골 바람 쐬며 수련해온 그의 마음마저 어지럽힌다. 책에 실린 ‘메리, 크리스마스’는 행적이 묘연해진 수경 스님을 염려하며 쓴 성탄절 편지다. 화계사 주지였던 수경 스님은 2010년 이명박 정부가 무작스럽게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에 절망해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다”며 홀연히 사라졌다. 시인은 스님이 좋아하는 동치미국수, 잘 익은 갓김치, 매콤달콤 무말랭이를 준비하고 있다며 인사한다. “어디에 계시든 건강하시고요, 너무 용맹정진하시지 말고요, 스님께 따뜻한 국밥 한 그릇 공양하고 싶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안녕히.”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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