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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명박 청계천’ 향한 반어적 오마주

등록 2013-03-31 20:07

작가 이시백
작가 이시백
‘나는 꽃도둑이다’ 펴낸 소설가 이시백
청계천변 서민들 통해
이 시대 욕망·허위의식 들춰

민중 집단이 아닌 개개인의 삶
살아있는 입말로 해학적 풍자

“박태원 ‘천변풍경’의 21세기 버전”

농촌의 피폐한 현실을 해학과 풍자로 꼬집었던 소설집 <갈보 콩>(2010)의 작가 이시백(사진)이 새 장편소설 <나는 꽃도둑이다>(한겨레출판)를 내놓았다. 이 책에서 작가의 시선이 가닿은 곳은 서울하고도 청계천. 소설은 노점상을 비롯한 청계천변 서민들을 통해 이 시대 욕망과 허위의식의 밑바닥을 들춰내 보인다.

청계천 주변 상인들의 친목 모임인 ‘청심회’ 회원들이 어느 날 한꺼번에 파출소로 끌려간다. 처음엔 비 온 뒤 물 따라 청계천으로 올라온 잉어를 잡아 천렵을 한 죄를 물으려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경찰의 관심은 따로 있었다. 청계천 ‘복원’ 공사를 마친 시장이 기념 삼아 박아 놓은 명판이 뜯겨나가고 없었던 것. 사건 당일의 행적을 진술서에 적는 과정을 통해 이 청계천변 장삼이사들의 일상과 의식이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김치공장 공장장인 청심회 총무 명식, 만물상회 주인이자 애국 어버이 회원인 청심회 회장 황치산, 환경미화원 보조 심씨, 탈북자 출신 노점상 경일, 이발사 송재록, 양초 노점상 진근, 야동 노점상 야바위 킴, ‘특수 임무’ 박금남, 꽃 파는 행상 안 목사가 차례로 등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 사이에 경중의 차이는 특별히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집단 주인공을 택했다고 할 수도 있다.

“여그서 채이구 저그서 쫓겨난 것들이 꾸정물처럼 떠내려와 살던 청계천에 본토가 워디 있구, 펼쳐놓을 족보가 워디 있간디? 애견 센터 갱아지 족보라믄 모를까.”

야바위 킴이 박금남과 말다툼을 하던 중에 내뱉은 이런 발언은 그들이 우리 사회의 주변인이자 약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민중인 것인데, 이시백 소설의 장점 중 하나는 민중을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시백 소설의 민중은 선과 악, 이기와 이타, 탐욕과 헌신, 그리고 우매와 지혜 사이에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걸쳐져 있다. 민중을 공통의 모순과 전망으로 묶인 단일 집단으로 파악하는 계급론적 시각과는 뚜렷한 거리를 두는 것이며, 그런 점이 이시백 소설의 리얼리즘에 신뢰를 보내게 한다.

가령 김치공장에서 매일 김치만 먹기에 지친 명식은 도시락을 싸오겠으니 점심 식대를 달라고 사장에게 요구했다가 공장에서 쫓겨날 처지에 몰리는데, 분식점을 하는 그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김치공장 사장 욕을 하다가도 막상 자신이 부리는 종업원 영식 엄마가 제대로 된 점심을 배달시켜 달라고 요구하자 딴소리를 한다.

“밑이서 봉급이나 타먹는 이들이야 심간 편허겄지. 막상 경영을 책임지는 오나 입장이 되믄 고민되는 게 부지기수여. 막말루 장사 안되구 골 아프니 가게 문 닫아버리믄 내야 워치게든 못 살겄어? 솔직히 그리 되믄 영식 엄마는 워측허구, 배달허는 종철이는 당장 워쩔 것이냔 말이여.”

그런가 하면 면도사였던 아내가 손님들에게 퇴폐 서비스를 하던 시절에 대한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는 송재록은 키스방에 가서 같은 청심회 회원 명식 딸의 입술 서비스를 받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촛불이 아니라 돈”이라 믿으며 평생 부자들의 정당에만 투표를 해 온 진근은 서울광장의 시위대 속을 헤집고 다니며 목소리를 높인다. “자-아, 비정규직 없는 세상! 촛불 있어요, 촛불!”

이시백 소설의 또 다른 장점은 생동하는 입말과 해학이다. 이문구의 타계 이후 맥이 끊기는가 싶던 구어투의 전통을 그는 훌륭하게 잇고 있다. “아, 웬 된장에 간장 치는 소리야?” “불난 집에 생선 구우러 온다더니” “물꼬받이에 괸 올챙이처럼 복작거리며” 같은 절묘한 표현들은 독서의 재미를 한껏 더하며 잊고 있던 우리말의 힘과 아름다움에 다시 눈 돌리게 한다.

“생긴 대루 논다더니, 하관이 기다랗구 주둥이가 톡 발족한 게 영락읎는 쥐 상이더만 여간 좀상스러운 게 아녀.”

인용한 말은 명식 처가 김치공장 사장을 두고 한 험담이지만, 서울시장 출신 전 대통령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청계천을 무대로 한 <나는 꽃도둑이다>는 이명박 시대의 청계천에 대한 반어적 오마주이자, 작가 자신의 말대로 “박태원 소설 <천변풍경>의 21세기 버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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