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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툭툭 잽처럼 경쾌하게 던지는 단편들의 명료함

등록 2013-06-23 20:05

김언수 작가
김언수 작가

김언수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김언수 첫 단편집 ‘잽’
‘안전거리’ 유지하는 풍경
희비극적 삶의 단면 포착

<캐비닛>과 <설계자들>의 작가 김언수(사진)가 첫 단편집 <잽>을 펴냈다. 두 장편의 세계가 워낙 강렬하고 개성적이었기 때문에 김언수는 어쩐지 장편 전문 작가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실 그는 2002년 <진주신문> 가을문예공모에 단편이 당선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잽>에는 등단작 둘을 포함해 아홉 단편이 묶였다.

“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잽>)

“문장은 짧게 써. 그래야 명료해 보이고 읽는 사람이 이해도 잘되지. 쓸데없는 수식어는 붙이지 말고,(…). 진술서의 핵심은 경제성이야, 경제성. 경제적인 문장 말이야.”(<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

인용한 대목들은 삶과 글쓰기에 관한 김언수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잽>의 인용문이 삶에 임하는 자세를 알려준다면, <…글짓기 교실>의 가르침은 글쓰기에 관한 지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양쪽 인용문 모두 삶과 글쓰기에 두루 적용 가능해 보인다. 툭툭, 잽을 날리며 경쾌하게 링 위를 오가는 복서의 움직임과 짧고 명료한 글쓰기 사이에는 모종의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잽>의 주인공인 고등학생 소년은 수업 시간에 창밖 회오리바람의 아름다운 움직임에 감탄사를 내뱉었다가 반성문을 쓰라는 요구를 받지만 그를 거부하면서 대신 테니스장과 화장실 청소를 떠맡는다.

‘반성문 쓸 때까지’라는 조건 때문에 매일 청소를 해야 했던 그가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에 다니기 시작한 권투 도장에서 관장이 내린 최초의 가르침이 바로 잽에 관한 이야기였다. 실제로 경기에 나가 누군가의 얼굴을 향해 잽을 날릴 기회는 없었지만, 반성문을 대신한 청소를 1년 정도 묵묵히 해냈을 때 그에게 벌을 내렸던 교사가 ‘항복’을 선언한 일은 그가 청소라는 잽으로써 자신만의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음을 알려준다.

<…글짓기 교실>은 어느 날 난데없이 기관에 붙들려 가 암살 전문 공작원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이야기다. 고문을 거쳐 송정오한테서 진술서를 받아 낸 기관 요원은 그에게 진술서 쓰기에 관한 나름의 지침을 내린다. 김훈 소설 <남한산성>에서 칸이 내린 교지를 연상시키는 이 지침인즉 진술서는 물론 소설을 포함한 거의 모든 글쓰기에 적용 가능한 ‘불문율’이라 할 것이다. 애초에 거짓 자백과 진술서 쓰기에 거세게 저항했던 주인공이 나중에는 지침에 따라 진술서를 작성할 뿐만 아니라 그 “논리적이고 명확한” 세계에 점점 빠져든다는 설정은 소설의 본질과 운명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사기꾼이 거짓을 파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사기꾼은 환상을 파는 직업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거짓보다 진실에 훨씬 가깝다.”(<금고에 갇히다>)

송정오의 진술서에 해당하는 것이 <금고에 갇히다>의 주인공인 사기꾼이 규정하는 사기의 세계일 것이다. ‘거짓보다 진실에 훨씬 가까운’ 환상을 대표하는 것이 소설로 대표되는 허구의 예술임은 물론이다. 어렵사리 금고를 따고 들어갔지만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그 안에 갇히게 된 도둑들이 경찰을 기다리며 ‘뱀 주사위’ 놀이에 몰입하는 상황은 희비극적인 삶의 단면 하나를 재치있게 포착한다.

<설계자들>의 매력적인 누아르의 분위기를 풍기는 <단발장 스트리트>에서 제 손가락을 칼로 자른 뒤 태연하게 술을 마시던 ‘진짜 사내’가 하루 뒤 누군가의 칼에 찔린 주검으로 발견되는 허무한 결론, 알코올 중독으로 신세를 망친 전직 교수가 세상 끝과도 같은 하구의 별 볼 일 없는 삶에서 어울리지 않는 행복감을 맛보는 <하구>의 결말에서도 경쾌하게 스텝을 밟으며 잽을 던지는 김언수의 작가적 태도는 한결같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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