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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일하며 사랑하는 삶, 그게 참 힘들었다

등록 2013-06-30 20:07

<너를 봤어>의 작가 김려령은 “젊은이들의 가벼운 연애가 아니라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아픔 속의 사랑을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너를 봤어>의 작가 김려령은 “젊은이들의 가벼운 연애가 아니라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아픔 속의 사랑을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김려령의 첫 성인소설 ‘너를 봤어’
너를 봤어
김려령 지음/창비·1만2000원

영화로도 만들어진 <완득이>를 비롯해 <우아한 거짓말> <가시고백> 같은 ‘청소년 소설’로 인기를 얻은 작가 김려령(42)이 어른 독자를 대상으로 한 첫 소설 <너를 봤어>를 내놨다. 청소년 소설 작가의 첫 성인용 소설은 생각했던 것보다 강도가 세다. 소설의 큰 주제 둘을 폭력과 사랑이라 할 수 있을 텐데, 폭력은 가혹하고 사랑은 농도가 짙다.

주인공은 40대 중반의 잘나가는 남자 작가 정수현. 문학잡지를 내는 출판사의 편집자기도 한 그는 여자한테서 ‘예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지녔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사막처럼 메마르고 거칠기 짝이 없다. 소설 도입부를 보면 염치없고 탐욕스러운 어머니가 그의 내면에 사막을 만들어 놓은 주범인 것처럼 보인다.

“내가 바란 건 밥 냄새 나는, 치맛자락으로라도 코 닦고 땀 닦아주는 그런 어머니였다.”

그러나 수현에게 어머니는 다른 남자의 무릎 위에 올라앉은 허연 엉덩이 또는 수상쩍은 사내들의 그림자와 함께 떠오를 뿐이다. 어린 자식들의 굶주림을 챙기기보다는 당장의 열락을 붙좇아 온 여자였다.

그런 어머니에 못지않게 어린 수현을 괴롭힌 것이 아버지와 형의 폭력. 아버지는 이유 없이 형을 때리고, 형은 수현에게 복수를 대신 하는 식이었다. 가정 내 폭력이라고는 하지만, 그 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셌고 견디다 못한 형제는 술에 취한 아비를 죽음 쪽으로 떠민다.

부모의 외도와 폭력의 악순환
자살한 아내의 짙은 그림자 속
사막같은 중년의 ‘사랑의 종말’

시궁창이라 표현되는 그런 환경에서 수현은 타고난 재능 덕에 탈출했지만, 어머니와 형은 여전히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어머니가 놈팡이 같은 영감의 꼬드김에 빠져 자신에게 돈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던 수현은 그 ‘놈팡이’가 다름 아닌 형이며 그 형이 이제는 자기를 대신해 늙은 어머니에게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급기야 형을 때려죽인다!

수현을 둘러싼 사막 같은 환경이 부모와 형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사랑 없는 결혼 끝에 자살한, 역시 작가였던 아내의 그림자가 또한 짙게 드리워져 있다. 주변에 냉기와 적대감을 뿜어대는 것을 자신의 존재감으로 삼았던 아내의 자살을 조장 내지는 방조했다는 자책감이 수현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

이토록 어둡고 삭막한 수현의 삶에 찾아온 햇볕 혹은 단비 같은 존재가 후배 여성 작가 서영재다. 일을 핑계로 만난 두 사람은 순식간에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고, 그 사랑은 애틋하면서도 격렬하다. 그렇지만 이미 마음속에 사막을 키우고 있는 수현에게 그 사랑은 결코 순탄하거나 행복할 수는 없는 사랑. 그는 사랑의 한가운데에서 그 종말을 예감한다.

“사람을 죽이는 게, 사람이 죽는 게 너무 쉬웠다.(…)아버지와 형, 내가 죽인 것일지 모르는 아내.(…)이제 그만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이 제발 사랑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재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의 절정이라 할 무렵, 수현이 영재를 상대로 갑작스럽고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는 대목은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재의 얼굴을 향하는 제 손을 두고 수현은 “누군가 내 손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서는 어쩐지 에밀 졸라 식 자연주의의 냄새가 난다. “일하며 사랑하는 삶을 원했는데 그게 참 힘들었다”고 토로하는 수현을 자연주의가 말하는바 유전과 환경의 포로라 할 수 있지 않겠나.

내용을 요약하고 보면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 같지만, 작가는 문단 안팎의 우스갯소리와 작가들에 관한 풍자로 균형을 맞춘다. 책을 내고 지난달 25일 기자들과 만난 김려령은 “내 원래 전공이 소설인데 청소년물을 먼저 발표하다 보니까 청소년물 작가로 굳어진 느낌이 있다”며 “앞으로는 성인물과 청소년물을 가리지 않고 쓰겠지만 당분간은 일반 소설에 집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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