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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치매 걸린 살인범의 독백, 어디까지 사실인가

등록 2013-07-28 20:25

양녀 보호 위해 마지막 범행 계획
객관적 진술과 병증 표출 뒤범벅
승자는 죽음도 기억도 아닌 시간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1만원

김영하(사진)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은퇴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올해 나이 일흔인 그는 열여섯 살에 폭군 아버지를 베개로 눌러 죽인 것을 시작으로 마흔다섯 살까지 “30년 동안 꾸준히 사람을 죽였다.” 특별히 개인적인 원한이 있거나 금전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이 세상과 혼자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연쇄살인을 추동한 것은 아쉬움과 희망이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이 그로 하여금 거듭해서 손에 피를 묻히게 했다.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은 뒤 그 희망이 사라졌고 그는 살인을 그만두었다. 마지막 희생자의 딸 은희를 입양해서 홀로 키웠다. 올해 스물여덟인 그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전직 킬러가 보기에 그 남자친구 박주태는 지역 사회를 떨게 만들고 있는 이십대 여성 연쇄살인의 범인. 은희가 위험하다! “내 생애 마지막 할 일이 정해졌다. 박주태를 죽이는 것이다.”

이제 늙은 살인자와 젊은 ‘후배’ 사이에 일대 결전이 펼쳐지는가 했는데,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김병수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치매 환자라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조심해야 한다. 소설은 김병수를 일인칭 화자로 삼아 서술되는데, 해마가 위축되어 기억 회로에 이상이 생긴 그의 진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김병수의 발언은 독자가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원이지만 그것은 객관적 진술과 병증의 표출 사이를 제멋대로 오가는 불확실한 텍스트일 뿐이다. 김병수는 소설론에서 말하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일종인데, 이 경우에는 다른 사례들보다 더 고약하다. 일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화자’란 그 나름의 일관성을 지니게 마련이지만, 치매 환자 김병수에게서 그런 식의 일관성을 기대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의 발언에서 최소한의 정보를 얻는 동시에 병증의 정도를 추측해야 한다. 텍스트의 표면에 머물 게 아니라 그 텍스트가 감추거나 왜곡하는 것을 캐내는 징후적 독법이 필요하다.

표면적으로 이 소설은 은희를 죽인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은희는 김병수가 믿고 있는 대로 그의 양녀가 분명한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는 범인을 추적하고 진실을 밝히는 데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치매라는 병증이 한 영민한 살인범의 뇌를 파괴하고 그의 기억을 파먹어 가는 과정을 그리는 데에 작가는 공력을 기울인다. 그렇다면 김병수의 뇌를 망가뜨린 치매의 주인은 누구인가.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김병수가 기자에게 한 이 발언을 참조해 보자. 제목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방점은 ‘살인’보다는 ‘기억’ 쪽에 찍혀 마땅하고, 다시 기억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요컨대, 최종 승자는 김병수도 박주태도, 죽음도 기억도 아닌 시간이라는 것.

전체 149쪽에 이르는 소설 본문에서 김병수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 장면은 13쪽에 나온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기억이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실제로 소설이 진행되면서 김병수는 점점 더 기억을 간직하는 데 애를 먹는 것으로 그려진다. 급기야 그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다”(147쪽)고 진술하기에 이른다. 청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다. 말의 의미 형성에 필요한 맥락과 기억 환기 능력이 바닥을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13쪽 이전의 진술은 객관적 사실이고 그 뒤의 진술은 치매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그리고, 받았다면 얼마나 받은 것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왜곡인가. 가령 그가 은퇴한 살인자라는, 이 소설의 바탕을 이루는 진술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치매 환자의 해마에 뚫린 구멍처럼 <살인자의 기억법>에는 답할 수 없는 숱한 의문의 구멍이 나 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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