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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낯선 풍경을 찾아서…순결한 언어들의 모험여행

등록 2013-08-04 22:18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
허만하 지음
문예중앙·8000원
1932년생인 허만하(사진) 시인은 문단의 대표적인 원로 시인이다. 그보다 연치가 높은 시인으로 황금찬(1918년생) 홍윤숙(1925년생) 김종길(1926년생) 김남조(1927년생) 이생진(1929년생) 등이 있지만, 시적 긴장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이 선배 시인들과 허만하 시인 사이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시인으로서 오랜 공백기를 거쳤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1957년에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1969년 첫 시집 <해조>를 낸 뒤로는 의업과 교수직에 전념하느라 시를 멀리했다. 일종의 ‘사건’이었던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가 나온 것이 1999년. 그 이태 전인 1997년 그는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한 터였다. 그 뒤로 그는 3~4년 간격으로 꾸준하게 신작 시집을 내 왔으며, 그 사이사이 몇권의 산문집과 시론집도 상재했다.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는 허만하 시인이 <바다의 성분>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여섯 번째 시집이다. 제목에서 보듯 노시인의 관심은 시의 본질과 방법론 등에 쏠려 있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시에 관한 시들이 묶인, 메타 시집이다.

허만하 시인. 사진 문예중앙 제공
허만하 시인. 사진 문예중앙 제공

원로시인 허만하의 6번째 시집
“시는 겨울이요 내 언어는 봄풀”
시의 본질 묻는 시들 함께 묶어

“나는 근접하면 동상을 입는 세계의 극한을 찾는 여린 언어다. (…) 시의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다. 한겨울 바람 앞에서 내 언어는 땅 밑에서 파릇파릇 돋는 봄풀이다. 온몸으로 가늘게 떠는 연약한 한 줄기 감수성. 역사의 발에 밟힌 끝에 대답처럼 다시 본래의 체위를 찾고 마는 초록색 풀의 강인함.”(<시의 계절은 겨울이다> 부분)

“정상을 향하여 고요히 엎드리는 일.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순결한 자세. 마지막으로 쳐다본 푸름은 그럴 수 없이 투명했다. 빛의 눈사태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고, 최후의 언어는 적설량에 묻혀 얼고 있다. 시는 고요히 타오르는 얼음의 불꽃이다. 순결한 언어는 영하의 세계에서 빛난다. 자일은 없다, 한순간의 눈부신 영원뿐이다.”(<그럴 수 없이 투명한 푸름> 부분)

시인에게 시의 언어는 순백과 영하 또는 투명한 푸름으로 형상한다. 시의 계절이 겨울인 까닭은 흰 눈의 깨끗함, 그리고 얼음의 투명한 결빙이 시어의 순결성과 통하기 때문이다. 백지처럼 온갖 가능성으로 충만할 뿐 역사와 이념에 오염되지 않은 것이 그가 생각하는 시적 언어다.

그것은 물론 가능하지 않은 바람이다. 언어란 인간의 경험과 느낌, 사유에서 빚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다.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의 모습을”(<흰 종이의 전율>), 또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풍경”(<모래사장에 남는 물결무늬처럼>)을 언어로 채집하고자 하는 무모한 존재가 시인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풍경을 그는 거부한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눈동자 거울>) 또는 “나를 거부하는 낯선 풍경”(<모래사장에 남는 물결무늬처럼>)을 그는 찾아 헤맨다. 그것이 말 그대로 새로운 경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참신한 관점을 뜻한다는 것을 부언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런 풍경을 만나는 일, 그러니까 시적 대상을 찾아내고 그것을 시로 옮기는 일을 가리켜 그는 “광활한 미지의 지평을 앞에 두고도 현무암 벼랑 끝에 수직으로 서는 아슬아슬한 전율”()이라 표현한다. 이번 시집에는 벼랑을 노래한 시가 여럿 보이는데, 순결한 언어로써 새로운 풍경을 포착하는 일의 떨림을 시인은 벼랑에 빗댄 것이다.

“벼랑은 앞가슴만 있지 등이 없다. 자욱한 김 소리 뿜으며 습곡을 흘러내리는 선홍색 용암의 뜨거움과 흰 빙하기의 냉혹한 추위를 기억하는 무기물질의 응집. 바스러지기 직전의 바위 피부에 묻어 있는 무수한 계절의 햇살, 달빛, 그리고 바람의 흔적.”(<벼랑에 대하여> 부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예중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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