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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사람] 해직기자 아내의 아픈 기억 이제 탈고합니다

등록 2013-08-27 19:47수정 2013-08-27 22:52

등단 17년만에 첫 시집 펴낸 조영화 시인
등단 17년만에 첫 시집 펴낸 조영화 시인
등단 17년만에 첫 시집 펴낸 조영화 시인

정연주 전 KBS 사장 아내로
신군부때 고문 당한 뒤 미국행
10여년 고생하며 류머티즘 악화
분노 절제 가능할 때만 시 써
“시집 나오니 아이 태어난 기분”
시인 조영화(사진)씨는 오랜 시간 시를 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마음속의 분노가 너무 클 때 뭔가를 배출하듯 시를 써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절제할 수 있다고 느껴질 때만 조용히 거실에 앉아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불편한 오른손을 움직여 시를 써내려갔다.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지 17년, 직장인들은 은퇴할 시기에 첫 시집 <느림의 계단>(도서출판 화백 펴냄)을 낸 까닭이다.

시를 사랑했던 영어교사, 조씨의 조용한 인생은 남편 정연주 전 <한국방송>(KBS) 사장을 만나며 급물살에 휘말렸다. 1974년에 결혼해 이듬해 첫아이를 낳아 육아에 허덕이던 때,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남편은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한 뒤 단식투쟁까지 나섰고 해직에 이어 투옥의 고초를 겪었다. 간신히 석방됐던 남편은 둘째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수배됐다.

80년 5월17일 전두환의 신군부는 ‘국기 문란자들’이라며 800여명의 ‘블랙리스트’를 발표해 수배했다. 남편이 없는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은 두 아이의 엄마인 그를 서울 강남의 한 건물 지하로 끌고 가 “남편이 있는 곳을 대라”며 사정없이 폭행했다. 조씨는 “안경을 벗자마자 정신없이 얼굴을 맞았는데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치마를 수습하느라 더욱 참담했다”고 기억했다.

‘미열로 밤새 보채던 아기/ 새벽이 달래어 잠이 막 든 틈새로/ 고양이 걸음으로 방문을 나선다.// 어제 저녁 챙겨놓은 면회 보따리 속/ 겨울 속옷 양말 두터운 솜옷이 몸보다 더 크고/ 마음보다 더 무겁다./ 새벽 시내버스 안은/ 남편과 할 얘기로 그만 무게를 잃는다. 현저동 백일번지 언덕배기 바람은/ 시베리아의 시어머니다. 머플러 너머 살바람이 귓살을 갉는다.’(‘일천구백칠십팔년 겨울 며칠-면회가는 날’)

고문을 당한 뒤 한동안 “이 나라에는 신도 죽었다”는 절망감에 빠졌다. 도청과 미행에 시달리다 보니 자꾸 곁눈질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생계를 책임지느라 참기름, 꿀 등을 팔기도 했던 그는 82년 미국으로 건너가 89년 남편이 <한겨레>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하게 될 때까지 갖은 고생을 했다. 하지만 <혼불>의 고 최명희 작가, 여고 시절 국어 선생님인 박연신씨 등의 권유와 자극 덕분에 내내 시를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연둣빛 시집을 받아드니 “아이가 태어난 기분”이라는 그, 힘들게 키웠던 두 아들도 모두 자라 독립했다. 이제 집에 자신만의 공간도 좀 늘리고 오롯이 “다음에 태어날 아이”에게만 집중해보려고 한다. 호가 ‘잎새’인 조씨의 시인 인생은 지금부터다.

글·사진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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