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역설과 반어로 무장, 싸우지 않고 이긴다

등록 2013-09-01 18:39수정 2013-09-04 14:06

이영광 시인. 사진 창비 제공 ⓒ박민주
이영광 시인. 사진 창비 제공 ⓒ박민주
이영광 새 시집 ‘나무는 간다’
기도하지 않는 기도의 간절함
수동적 적극성의 ‘두부 병법’

나무는 간다
이영광 지음
창비·8000원

이영광(사진)의 네번째 시집 <나무는 간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역설과 반어의 수사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기죠”(<저녁은 모든 희망을>)라거나 “살려고 발버둥치지 않은 것,/ 그것이 나의 발버둥이었지만”(<오일장>) 또는 “쉼 없이 멈춰 있다”(<한점 배후도 없이 나무는>)처럼 얼핏 모순어법으로 들리는 구절들이 시집에는 빈발한다.

시인의 종요로운 임무 하나가 언어의 갱신이라는 사실은 이영광의 역설과 반어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법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영광의 역설과 반어에는 하나의 분명한 흐름이랄까 지향이 있다. 앞서 인용한 구절들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수동적 적극성’ 또는 ‘적극적 수동성’이라 할 법한 태도가 그것이다. 아니 ‘수동적(성)’이라기보다는 도가적 ‘무위’라고나 해야 할 삶의 자세가 시집 전체를 관류한다.

“나의 기도는/ 기도하지 않는/ 기도이다/ 기도할 수 없는 기도이다/ 주저앉는 기도이다/ 뭉개지는 기도이다”(<기도> 부분)

“나에겐, 무장해제로 무장한/ 무적의 진심이 있네/ 죽음밖엔 적은 적 없는데/ 내 책은 늘 삶으로 가득했네”(<치매였을까> 부분)

“기도하지 않는/ 기도”와 “무장해제로 무장한/(…)진심”이 알려주는 것은 그 어떤 기도보다 간절한 기도, 그리고 세상 모든 창과 방패보다도 강력한 진심의 존재이다. 이렇듯 적극적이기보다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하지 않음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는 시인의 전략을 ‘두부병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아무것도 깰 줄 모르는/ 두부로 살기 위해서도/ 열두 모서리,/ 여덟 뿔이 필요하다// 이기기 위해,/ 깨지지 않기 위해 사납게 모 나는 두부도 있고/ 이기지 않으려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모질게/ 모 나는 두부도 있다”(<두부> 부분)

시인이 이기려 하기보다는 이기지 않으려 하는 두부 쪽임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싸움을 포기하려 한다고 지레짐작해서는 곤란하다. “팔뚝에 푸른 ‘反共’을 새기고” “일용할/ 빨갱이들이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하는 ‘과거’(<과거는 힘이 세다>), 또는 “소 돼지를 잡듯/ 물의 멱을 따고 강의 배를 가르는 피바다//(…)/ 강의 뼈를 부수고 물의 내장을 긁는 형장”(<절망>)에 대해 그는 충분히 분노하고 절망한다. 그렇지만 그 ‘적’들을 상대하는 그의 전략이 달라졌다. “변혁에 대한 갈망으로 불”(<저녁은 모든 희망을>)타는 것은 더는 그의 방식이 아니다. 이제 그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저녁은 모든 희망을>). 그는 싸우지 않고, 더 가능하다면 짐으로써 이기는 싸움을 꿈꾼다.

“싸움꾼은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저렇게, 싸우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저렇게 싸워야 한다”(<한점 배후도 없이 나무는> 부분)

“이 생이 이렇게 간절하여 나는 살고 싶으니,/ 자꾸 죽자 자꾸 죽자/ 죽기 전에”(<오일장> 부분)

통념과 상식을 거스르려는 듯한 그의 태도는 ‘삐딱이’ 노자를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거나 “바른 말은 마치 반대되는 것 같다”(正言若反)는 <도덕경>의 구절들이 이영광의 시로 환생한 듯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는 애초에 시와 시인의 속성이 역설과 반어에 있다. ‘시인님’이라 쓰인 우편물들과 그를 ‘시인님’이라 부르는 인터뷰어와 전화 발신자들 앞에서 그가 곱씹는 시인의 본질을 보라.

“시인님이 되느니/ 땅끝까지 실종되고 말겠다/ 시인님이 되느니/ 살처분당하는 분홍 돼지가 되겠다// 높이지 않아도 시인은/ 만장처럼 드높으므로/ 아무리 높여도 시인은/ 꿇은 상주처럼 낮으므로”(<시인님> 부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