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설집 <팽이>를 낸 작가 최진영은 “등단작을 7년 만에 다시 읽어 보고 그새 내가 타성에 물들어 있었음을 알게 됐다”며 “앞으로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좀더 자기 색깔이 분명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신진 작가 최진영의 첫 소설집
속악한 세상에 대한 공포와 적의
연쇄적 폭력과 파국으로 치달아
속악한 세상에 대한 공포와 적의
연쇄적 폭력과 파국으로 치달아
최진영 지음
창비·1만2000원 최진영(32)의 첫 소설집 <팽이>는 분노의 에너지로 마그마처럼 들끓는다. 그 분노의 마그마가 임계치를 넘어서면 화산이 폭발하듯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분노에서 파국에 이르는 심리와 사건의 흐름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이 최진영의 소설 작법이다. 책 맨 앞에 실린 <돈가방>은 뜻밖에 얻어걸린 거액의 돈가방을 두고 벌이는 두 형제와 그 아내들의 신경전을 다루지만, 초점은 동생 부인이 겪는 분노와 좌절의 심리 드라마에 맞추어져 있다. 외제차를 굴리며 사업을 하는 형 부부가 당장의 자금 압박을 핑계 대며 돈을 독차지하려 하는데, 정작 빚에 찌든 동생은 그런 형네를 감싸며 그에 반발하는 아내를 나무란다. ‘무엇이 아내를 악다구니나 부리는 여자로 만들었나. 행여 내가 아내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없는 살림 때문인가’라고 그는 제법 현자(賢者) 풍의 성찰을 흉내내 보는 것인데, 형 부부의 음모가 현실로 확인되는 결말부에서는 그 역시 세상과 자신의 속악한 욕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어지는 작품 <남편>에서도 아내는 믿었던 남편의 ‘배신’으로 고통받는다. 남편이 여고생 강간살인사건의 피의자로 붙잡혔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은 아내는 처음엔 “우리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라며 사태를 부인하려 하지만, 증거가 속속 드러나면서 남편의 무죄를 믿기 힘든 상황으로 내몰린다. 결국 아내는 ‘때리고 뒤엎고 차고 찌르고 죽이고 싶다’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맹렬한 적의에 휩싸이기에 이른다. <월드빌 401호>와 <창>은 분노의 게이지가 임계점 너머로 상승해 폭발하는 지점을 포착한다. <월드빌 401호>의 주인공은 문을 잠그고 창문과 문틈마저 밀봉한 채 한마리 개와 함께 숨어 지내고 있는 청년. 자신의 진술 때문에 살인죄로 복역하고 있는 ‘괴물’이 복수하러 올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에게 개 ‘종철이’는 유일한 반려인 동시에 자신의 공포와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할 대상이기도 하다. “내 이름을 붙여주고, 나처럼 방에 가뒀다./(…)/ 며칠씩 굶기고, 이제 곧 죽겠다 싶을 때만 먹을 것을 줬다. 짖어도 때리고 안 짖어도 때렸다. 움직여도 때리고 가만히 있어도 때렸다. 종철이는 나를 피하다가, 무서워하다가, 결국엔 대들었다. 우린 매일 싸웠고, 싸우다가도 딱 붙어서 잤다.” 공포와 분노가 폭력적으로 분출되고 그 폭력이 또 다른 공포와 분노와 폭력을 낳는 악순환은 <창>에서도 뚜렷하다. 직장 내 ‘왕따’인 이십대 후반 비정규직 여성 ‘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동료와 상사의 컴퓨터 파일들을 삭제하거나 엉뚱한 암호를 걸어 놓는 등 사무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은 채 도망친다. 그러나 골목 모서리 옥탑방에 몸을 숨긴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엇? “검은 그림자가 창문 위로 불쑥 솟아오르고 와장// 창. 창이/ 깨진다”는 결말은 <월드빌 401호>와 마찬가지로 폭력과 파국의 연쇄로 이루어진 세계의 실상을 보여준다. 등단작이자 표제작인 <팽이>를 비롯해 단편 열이 묶인 소설집에는 알레고리로 분류할 만한 작품도 몇 포함되었다. 사막의 낙타 혹에서 튀어나온 새끼 펭귄과 자라를 주인공 삼은 <새끼, 자라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청년이 나오는 <어디쯤>, 코끼리를 데리고 사는 스물여덟 살 남자의 이야기 <엘리> 등이 그러하다. 이 다채로운 알레고리들이 이 시대 청춘의 막막한 처지를 겨냥하고 있다면 <팽이>의 마지막 장면은 신진 소설가의 출사표로 읽힌다. “지구처럼 단단하고 둥그런 돌덩이가 되어버린 방을 등지고 나는 바다를 향해 걸었다.”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최진영은 2010년 장편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으로 제15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았으며, 2011년 두 번째 장편 <끝나지 않는 노래>를 내놓았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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