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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와 문명’ 두개의 헌팅 최종 승자는

등록 2013-09-23 11:49

<헌팅>의 작가 조영아는 “비전향 장기수에서부터 어린 아이돌까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헌팅>의 작가 조영아는 “비전향 장기수에서부터 어린 아이돌까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헌팅
조영아 지음/한겨레출판·1만2000원
한겨레문학상(11회) 수상 작가 조영아의 소설 <헌팅>에서는 두개의 헌팅이 맞선다. 주인공인 원시 소년 시우의 토끼 사냥이 그 하나고, 시우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찍는 린의 영상 작업이 다른 하나다. 알다시피 영어 ‘헌팅’에는 카메라에 담기 좋은 장소나 대상을 물색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

소설 속 두개의 헌팅은 상호보조적이면서 또한 적대적·모순적이다. 시우의 원시적 삶이 세상에 알려지고 문명 세계 사람들에게 모종의 교훈을 주게 된 것은 린의 다큐멘터리 덕분이지만, 그 결과 시우는 원시의 삶에서 튕겨져 나와 문명 세계의 한복판에 던져지게 된다. 시우가,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린에 대해 양가감정을 지니게 되는 까닭이다.

두개의 헌팅이 만나는 첫 단계는 사뭇 우호적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제보를 받고 헌팅을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린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가까스로 시우를 만나고 시우가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움막으로 간다. 들쥐를 잡아 구워 먹는 모습을 보며 헛구역질을 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며 휴대전화도 먹통이고 화장실이 따로 없어 아무 데서나 볼일을 보아야 하는 움막의 삶은 린에게 불편함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린은 곧 그곳 삶에 적응한다. 키와 나이에 대한 개념이 뒤죽박죽인 시우에게 그 둘의 차이를 설명해 주며, 할머니를 설득해 그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매일 아침 자신의 나이를 잰다며 표시를 해 둔 자작나무까지 맨발로 달려가는 시우를 이해하고자 어느 새벽 린 역시 벗은 발로 달리기를 해 본다.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 우주가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발바닥을 열고 린의 몸 안으로 들어온 우주는 무수한 세포마다 별을 달았다.”

신발과 양말이라는 매개물 없이 벗은 신체로 만나는 대지는 린에게 우주와 하나가 된 듯한 충일감을 선사한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동안 세상을 뜬 할머니의 주검을 당자의 유언에 따라 풍장-이라기보다는 조장(鳥葬) 방식으로 자연에 돌려보내는 ‘잔치’ 장면 역시 비슷하게 다가온다. 문명의 삶이 편리와 체면을 위해 버린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 삽화들은 보여준다. 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시청자들,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 역시 린이 받은 느낌을 전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린에게 시우의 ‘맨발’과 할머니의 ‘잔치’는 무엇보다 헌팅의 대상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 그가 원시의 삶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두고 온 문명의 삶을 포기하고 움막의 삶에 편입될 생각은 전혀 없는 것이다.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시우를 데리고 문명 세계로 돌아와서의 이야기가 소설 후반부를 이룬다.

문명과 야만의 삶이 다르듯 소설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는 사뭇 딴판인 양 다르다. 린의 다큐멘터리가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어 인기를 끄는 바람에 ‘원시 소년’ 시우는 덩달아 유명인사가 되고, 잦은 인터뷰와 방송 출연 끝에 영화배우로 신분을 바꾸어 일약 청춘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아이돌 가수 겸 배우 제이와의 사랑은 그 한 절정일 테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행운은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스러지고 만다.

작가는 원시와 문명의 대결만으로는 부족했다 싶었는지, 시우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야기를 통해 비전향 장기수와 연좌제 문제까지 소설에 끌어들인다. ‘주홍글씨’로 상징되는 연좌제의 사슬은 시우 아비 박승준으로 하여금 비행기라는 ‘절대 자유’에 집착하고 끝내 비행기 사고로 삶을 마감하게 만든다. “이 문명의 이기(=비행기)를 무자비한 사냥(=이념과 연좌제)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쓰고자” 한다는 승준의 말에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소설로 충분히 몸을 바꾸었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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