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의미의 소설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이번 소설이 내가 쓴 유일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천국에서>의 작가 김사과는 그러나 “이번 소설을 쓰면서 소설 자체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며 “앞으로는 시를 쓰거나 아예 다른 분야의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앙팡 테리블’ 김사과의 장편
홍대 앞에서 뉴욕을 그리워하는
주인공 여대생 눈높이에서 관찰
홍대 앞에서 뉴욕을 그리워하는
주인공 여대생 눈높이에서 관찰
김사과 지음
창비·1만2000원 불편한 소재와 공격적인 문제의식, 거침없이 내달리는 문장과 낯설고 실험적인 형식. 김사과(29)에게 ‘문단의 앙팡 테리블’이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까닭이다. 강력한 개성을 확보한데다 생산성도 높다. 스물한살 ‘어린’ 나이로 등단한 지 햇수로 9년 만에 벌써 다섯번째 장편소설. 그 사이에 소설집도 한권을 냈다. 새로 나온 장편 <천국에서>는 이전 소설들에 비하면 한결 읽기에 수월하다. 주인공의 공격성은 크게 누그러졌고, 세계에 대한 작가의 분노도 안으로 많이 잦아든 느낌이다. 자신과 자기 세대를 객관화하고 문제의 원인을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으려는 모습도 보인다. 젊은 세대의 입말을 살린 구어투의 지문은 여전하지만, 사회학 보고서를 읽듯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문장들이 안정감과 신뢰성을 더한다. 주인공인 여대생 케이(K, 한경희)는 여름 한철을 미국 뉴욕에서 보내고 서울로 돌아온다. “세련되게 젊음을 탕진하는 귀여운 백인 여자애” 서머와 서머의 남자친구인,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어딘가 천재 같은 유대인” 댄과 어울린 뉴욕은 달콤하고 짜릿한 축제의 날들이었다. “바로 그걸 케이는 원하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뭔가를. 삶의 모든 지루함을 날려버려줄. 그런 걸 얻을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 어떤 위험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술과 마약, 음악과 파티 그리고 무엇보다 뉴욕과 뉴요커들과 함께했던 날들은 어느덧 과거의 추억으로 물러나고, 케이에게는 “돌아온 뒤 서울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덜떨어지게 느껴졌다”. 몸은 서울에 있으되 마음은 뉴욕에 두고 온, 이 분열증 환자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게 홍대 앞 친구들. 그런데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소시민들을 바라보며 그들과 똑같이 취급될까봐 불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안락한 소시민의 세계에서 탈락할까봐 조마조마해했다. 그 소시민적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취향을 선택했다. 마치 속물들이 아파트와 자동차의 브랜드로 서로를 재듯이, 그들은 세련된 것들의 목록을 끝도 없이 늘리며 자신들을 방어하는 한편, 또한 벗어날 수 없는 자신들의 출신계급을 향해 무해한 공격을 시도했다.” 홍대 앞에서 뉴욕을 그리워하는 케이에게 다가온 사람이 뉴욕에서 태어났다는 남자 재현이다. 대학을 세군데나 거쳤지만 졸업장 하나 없이 여전히 학생 신분인 이 서른 넘은 남자의 유일한 즐거움은 연애. 댄디한 포즈에 혹해 그와 연애를 시작했던 케이는 머잖아 그의 공허하고 뒤틀린 내면을 확인하고 관계를 정리한다. 곧이어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초등학교 동창 지원과 연인 관계에 들어가지만, 어쩔 수 없는 ‘계급 차’ 때문에 그 관계 역시 오래가지는 못한다. 여기에 독일 베를린에서 히피적 반문화를 경험하고 돌아와 지금은 광주에서 통닭집을 운영하는 중년 남자에 대한 매혹과 환멸이 이어지면서 케이는 문득 방향을 잃고 고립되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지긋지긋했다. 반복되는 그 생각이. 모든 것이 주위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듯한 그 느낌이. 혼자 남겨진 듯한 이 기분이. 정말이지 지겨웠다.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는 자신이 놓인 고독하고 평화롭지만 지루하고 무기력한 상황을 수족관 또는 ‘가짜 천국’으로 인식한다. 그렇다면 출구는 있는가? 댄이 테러 모의 혐의로 체포되고 서머는 광기에 잡아먹힌 뉴욕이 그 출구일 수는 없을 터. “여기는 천국이 아니야. 여기는 지옥이야”라며 현실을 극구 부정하던 그가 출구로 택한 것이 고작(!) 바깥으로 나가 걷고 달리기라는 결말은 다소 허무하다. 그런 작위적 결말보다는 출구 없는 젊은 세대의 방황과 고뇌를 그들의 눈높이에서 관찰하고 기록한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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