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작가 황정은은 “워낙 가혹한 이야기라서 작가로서 거리 두기에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어미의 폭력과 아이의 복수심
점막에 들러붙는 그 불쾌함은
폭력의 그림자와 윤리적 통증
점막에 들러붙는 그 불쾌함은
폭력의 그림자와 윤리적 통증
황정은 지음
문학동네·1만1000원 이 소설은 작가가 목격한 어느 노숙인의 뒷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연전에 일본 오사카에서 본 여장 노숙인의 형상이 너무도 강렬했던 나머지 그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기로 했노라고 황정은은 밝혔다. “재킷과 짧은 치마로 한 벌인 감색 정장”에 “비둘기 가슴처럼 빛깔도 감촉도 사랑스러운 스타킹을” 신은 소설 속 여장 노숙인의 이름은 앨리시어. 빛깔 영롱한 보석이거나 유럽 어느 작은 왕국의 공주를 연상시키는 이 이름의 주인공이 실제로는 어떤 대접을 받았던가. 자, 앨리시어가 문득 그대 앞에 나타났다 치자.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다.” 번잡한 네거리에서 오로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앨리시어. 그는 어떻게 해서 불쾌함이라는 갑옷을 입게 되었나. 작가는 그의 소년기로 독자를 데려간다. 늙은 아버지와 그의 젊은 아내 그리고 그들 사이의 소생인 앨리시어와 그 동생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등장한다. 늙은 아비의 관심사는 두 가지. 개발 예정지에 있는 집을 날림으로 증축해서 보상금을 두둑하게 받는 것과 개장 속 개가 낳는 새끼들을 키워서 잡아먹는 것이다. 앨리시어의 성장기를 지배하고 규정하는 쪽은 젊은 어미다. 어디서부턴가 꼬여 버린 제 삶에 대한 분노를 자식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폭행을 일삼는 것으로 해소하려는 비뚤어진 어미. “그럴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된다. 달군 강철처럼 뜨겁고 강해져 주변의 온도마저 바꾼다. 씨발됨이다. 지속되고 가속되는 동안 맥락도 증발되는, 그건 그냥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다.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이 그 씨발됨에 노출된다.” 그렇다. 이것은 폭력에 관한 소설이다. 그것도 그에 저항하거나 그로부터 도피하기 어려운 무력한 아이들을 상대로 한 비겁한 폭력. 인용한 대목에 연거푸 나오는 욕설은 그 폭력이 합리적이거나 아름다운 언어로 소화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 어미를 상대로 앨리시어는 복수를 꿈꾼다. 제 키가 어미의 그것을 넘어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환상 속에서 어미를 죽이는 이야기를 꾸며내 동생에게 들려준다. 여자처럼 치장하길 즐긴다는 이유로 제 친구 고미를 변태 새끼라 부르며 두들겨 패는 고미 아비 등짝을 막대기로 쳐서 쓰러뜨릴 때 그는 제 어미에게 해야 할 복수를 친구 아버지에게 대신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집에 와 보니 어미는 못에 찔린 발에 붕대를 감고 있지 않겠는가. “그에게 마침내 패배란 없다.(…)내일은 어제와 같지만 어제와는 다를 것이다. 세계의 귀퉁이가 약간 뒤집혔고 점차로 더 뒤집힐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제 그것을 안다.” 그렇지만 앨리시어는 역시 성급했던 것인지 사태는 그가 예상했던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그는 결국 여장을 한 채 사람들에게 불쾌감이나 선사하는 처지로 떨어진 것이다. 다시 그렇지만, 앨리시어가 구현하는 불쾌함의 정체란 무엇이겠는가. 그가 거느리고 있는 폭력의 그림자, 우리가 잊고자 하나 잊어서는 안 되는 윤리적 통증이 그 정체가 아니겠는가. 명백히 한국을 무대로 삼은 것으로 보이는 소설의 주인공 이름 앨리시어는 그가 구현하는 폭력의 편재성(遍在性)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 시의 경지를 넘보는 황정은 득의의 밀도 높은 문장이 매력적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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