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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시냇물, 흐린 날…세상 도처에서 황홀한 발견”

등록 2013-11-17 19:44수정 2013-11-17 19:44

고은 시인이 16일 오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 무설전에서 ‘시는 어떻게 오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고은 시인이 16일 오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 무설전에서 ‘시는 어떻게 오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고은 시인 ‘시는 어떻게 오는가’
시로 방향 튼 전등사에서 강연
“내 시의 기원은 과거 아닌 미래”
“전등사에서 내 드라마가 시작되었어요. 전등사 주지를 맡고 있던 어느 여름 저녁 마니산에 올랐지요. 친구가 내 시 <폐결핵>을 한국시인협회 기관지에 응모해서 잡지에 발표된 뒤였어요. 시의 길을 갈지 수행의 길을 갈지 밤새 고민을 하다가 먼동 틀 때쯤 시 쪽으로 결정을 한 거예요. 그 전등사를 그로부터 55년 만에야 다시 왔네요.”

16일 오후 3시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 다목적 공간 무설전에서 고은 시인의 강연이 펼쳐졌다. ‘시는 어떻게 오는가’라는 제목에 걸맞게 시인은 자신과 시의 첫 만남, 한국 현대시사 속 자신의 위치, 시 이론과 창작의 관계 등에 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200여 청중이 방석에 앉은 채 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쟁이 아직 진행 중이던 1951년 18살 나이로 출가한 고은 시인은 1957년 전등사 주지로 임명되어 1년 반 정도 재임했다. 1960년에는 해인사 주지대리에 오르고 첫 시집 <피안감성>도 출간하지만, 1962년 신문에 환속선언을 발표하면서 속세로 돌아온다. 전등사 시절은 그의 승려 경력의 한복판이자 종교와 문학 사이에서 문학 쪽으로 방향을 잡은 고은 문학의 모태라 할 수 있다.

“제가 처음 만난 시는 이육사의 <광야>였어요. 해방 직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이 작품이 들어 있었죠. 그때만 해도 나는 문학보다는 미술을 하고 싶어서 미술반에 들었어요. 그러다가 1949년 하굣길에 <한하운시초>를 주워 읽고서 문둥이 시인이 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전쟁이 터지면서 시인이고 화가고 생각할 여지가 없게 됐죠.”

최초의 신체시로 꼽히는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것이 1908년이었다. 고은 시인은 1958년에 등단한 자신이 “한국 현대시의 절반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육당과는 함께 차도 마시고 불교 경전에 관해 대화도 나누었으니 나는 50년짜리가 아니라 100년짜리”라고 그는 강조했다.

“나에게는 조상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조상이에요. 불교에는 은사 없는 무사승(無師僧)이 있지요. 나는 시의 아비 시의 어미를 다 죽입니다. 그 누구한테서도 영향을 받지 않아요. 그렇지만 돌, 시냇물, 흐린 날, 태풍… 세상의 모든 희열과 축복에는 영향을 받지요.”

고은 시인은 강연 앞머리에 <태백으로 간다> <강화에서> <가을의 노래> 등 자신의 시 여러 편을 열정적으로 낭독했다. 소리의 강약과 고저장단을 자재롭게 조절하며 발뒤꿈치를 들썩이는가 하면 얼굴 근육을 모두 동원한 다채로운 표정 연기가 어우러진 시인의 낭송에 청중은 숨소리를 죽이며 집중했다.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 시는 나에게 있고 세계에 있고 안과 밖 도처에 있어요. 나는 시의 발명자 이전에 그것의 황홀한 발견자이죠. 어쩌면 나는 시의 기원을 찾아가는 미지의 긴 여정을 걷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시의 기원은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어요.”

강연이 끝난 뒤 시인은 이날 강연회의 주최측이기도 한 ‘시와시학시인회’(회장 윤범모) 회원 시인들과 함께 뒤풀이를 했다. 시인이 강화에 사는 후배 시인 함민복을 보고 싶대서 누군가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알고 보니 함민복은 강연만 듣고 바로 귀가했던 것. 그가 술을 끊었다고 하자 시인이 말한다. “그래, 잘 끊었다. 그 술 내가 다 먹을게. 민복아, 그립다, 그리워. 진짜 그리워. 내가 너 가지고 시 하나 썼다.”

함민복에 관한 시는 새로 나온 그의 시집 <무제 시편>(창비)에 들어 있다. 미발표 ‘무제 시편’ 연작 539편과 근작시 68편을 묶은 이 방대한 시집 중 <무제 시편 139>가 그것이다.

“함민복이 그립네/ 서울에서/ 부산까지/ 서울 김포공항에서/ 제주공항까지/ 숫제 술 속의 함민복이 그립네// 또한 술 없는/ 썰물의 함민복이 그립네/ 술 없는 석모도가 그립네”(<무제 시편 139> 앞부분)

강화/글·사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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