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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직도 맥가이버 대사를 기억하듯 영상번역 흔적은 반드시 남는다”

등록 2005-09-01 17:09수정 2005-09-01 17:09

박찬순 교수의 ‘그때 번역이 내게로 왔다’
박찬순 교수의 ‘그때 번역이 내게로 왔다’
인터뷰/ ‘그때 번역이 내게로 왔다’ 낸 외화번역 전문가 박찬순 교수

“체코 프라하의 칼 대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힙니다. 1400년대에 세워졌는데 양쪽에 15점의 조각품이 서 있죠. 번역은 이런 다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실용성과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예술성처럼, 번역도 ‘전달’이라는 실용과 ‘심미성’이라는 예술을 두루 갖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30년 동안 외화의 우리말 번역을 해온 전문번역가 박찬순 교수(59·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과 서울여대 겸임교수)가 그동안 틈틈이 기록한 영상번역의 사례들과 그를 통해 모색한 번역이론을 담은 책 <그때 번역이 내게로 왔다>(한울 펴냄)를 냈다. 그는 “번역은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리가 돼야 한다”며 “소통의 미학”이라는 번역의 철학을 강조했다.

“정보 전달만을 목적으로 삼는 것을 최악의 번역이라고 한 베냐민의 말처럼 어떤 번역이든 내용과 함께 원작의 신비한 분위기와 시적인 리듬을 다 살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져 좌절을 안겨주지만 그 정신을 놓아선 안 됩니다.”

박 교수는 번역, 특히 영상번역의 가치를 값싸게 보는 우리 사회의 세태가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건 그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텔레비전의 외화 시리즈 <맥가이버>를 1980년대 후반에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도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직업적 습관을 지닌 제게, 요즘에도 아주 간혹 맥가이버의 대사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이 들립니다. 너무 반갑기도 하면서 번역이 참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죠.” 영상시대인 요즘엔 해외영상물도 크게 늘어 번역이 우리 말과 정신에 끼치는 영향도 더 커졌지만, 값싸게 속성으로 번역하는 ‘기업형 번역’도 덩달아 늘어 싸구려 번역이 많아졌다고 그는 걱정한다.

박 교수는 “영상번역은 출판번역과 달리 한 순간 허공에 머물다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반드시 어디엔가 남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영상번역은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의 미학을 의식해야 하고, 영상의 순간성 때문에 오히려 소통의 미학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이런 번역철학은 1968년 문화방송 피디로 입사해 막 방송일을 배우던 시절에 대선배한테서 전해듣고 감동한 롱펠로의 시 구절에서 비롯했다. 그가 롱펠로의 시를 왼다.

“나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네/ 화살이 떨어진 곳이 어딘지 몰랐네/ 화살은 너무 빨리 날아갔고/ 시선이 그것을 따르지 못했으므로.// 나는 허공을 향해 노래를 불렀네/ 노래가 떨어진 땅이 어딘지 몰랐네/ 그 누구에게 예리하고 강한 시력이 있어/ 날아가는 노래를 뒤쫓을 수 있으리.// 먼 훗날 어떤 참나무에서 나는/ 아직 부러지지 않고 박혀있느 그 화살을 찾았네/ 그리고 노래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친구의 가슴 속에서 되찾았네.” 이름없는 번역자가 누군가에게 남긴 말의 흔적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을까. 그는 늘 궁금하다.


그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방송사에서 퇴직한 뒤 1976년부터 외화 번역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30년 경험이 그에게 남긴 흥미진진한 경험담도 많다. “박정희 정권 때 방송사에서 히피 문화를 다룬 영화를 하나 수입했어요. 그런데 그때엔 장발족을 심하게 단속할 때인지라, 머리 긴 남자 등장인물들을 여자로 둔갑시켜 방영됐지요.” “영상번역자한테 가장 애를 먹이는 사람은 말이 빠른 배우들이죠. 빌리 크리스털, 맥 라이언, 줄리아 로버츠 같은 배우는 말이 총알입니다. 입놀림 장면 동안에 번역을 다 집어넣어야 하니까. 우리말 성우들이 흔히 ‘구겨넣느라 혼났다’고 합니다. 빌리 크리스털과 맥 라이언이 함께 나온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를 번역할 땐 그야말로 죽음이었습니다.”

그가 번역한 외화들은 <맥가이버>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 <아마데우스>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비롯해 모두 1천여편에 이른다고 한다. 1편을 평균 100분씩으로 헤아려도 무려 10만분, 곧 1666시간을 쉼 없이 방영해야 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최근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될 해외 예술영화의 번역을 마친 그는 “늘 상업영화에만 빠져 있다가 영화제에 갔다 오면 눈을 씻고 온 기분이 들어 좋다”고 말하는 영화광이기도 하다.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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