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강형철 지음
실천문학사·8000원 강형철(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사진)이 세번째 시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2002) 이후 새 시집 <환생>을 내기까지는 무려 1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세번째 시집을 낸 뒤인 2003년 5월부터 2005년 8월까지 그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사무총장을 맡아 이 기구가 민간 주도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이끌었다. 그 일을 시인 자신은 ‘공익 근무’라 표현한다. “시 몇 편이라도 쓰고/ 아니 시가 무엇인지 가슴에 조그만 확신이 서고/ 내 생활이 예전에 생각했던 시인의 생활이라고 느껴질 때/ 그즈음/ 나는 외출하리라//(…)// 복장도 준비되고/ 몸도 이제 거진 추슬러졌고/ 그런데 시는 왜 이리 안 오시는 것이냐/ 매정하게/ 남남으로/ 살고 있는 것이냐”(<하나마나한 결의> 첫 연과 마지막 연)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원 생활을 하다가 시가 좋아 뒤늦게 문학을 공부하고 시인의 길에 들어선 그였다. 문우들을 만날 때면 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곤 했던 그가 ‘공익’에서 시로 돌아오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머니가 있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오락가락하는 노모/ 옛 기억이 되살아나시는지 밥 안치는 일을 자청하신다/ 손목 아래로 빚어지는 정겨운 리듬/ 썩썩 써스럭, 써-억 써억 썩/ 바가지가 요란해진다/ 쏟아지는 수돗물이 시원타며 손등이 웃고/ 어둑한 집 안의 오후가 환해진다//(…)// “엄니, 다시 시집가도 되겠네, 쌀 씻는 소리 들응게”/ “야 좀 봐라, 못 허는 소리가 없네, 떼-엑!”’(<환생> 첫 연과 마지막 연) 그 자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른 시인은 지금 고향 집에서 혼자 치매 앓는 노모를 모시고 있다. 그가 ‘공익’의 제복을 벗고 시인의 웃음을 되찾는 과정에서 치매 앓는 어머니는 큰 힘이 되어 준다. 국회에서 여당이 법안을 강행처리했다는 뉴스를 들으며 “강행처리가 차코 나온다고/ 큰일이 터졌다고”(<이명>) 걱정하는 어머니. “평생 장남 일에 안 된다는 말 한번 안 하신 어머니” “내가 교회고 절이라고 하셨던 어머니”에게 아들이 건네는 “비장의 수면제”가 있다. 바로 ‘공부해야 돼요’라는 말이다. “오늘 하루도 잘 보냈네요 어머니 학교 갔다 오시고 밥도 먹고 야쿠르트로 입가심도 했고 약도 먹었네요 양치도 하고 팬티도 갈아입었으니 오늘은 다 끝났네요 어머니 고맙습니다 이제 편안히 주무세요 저는 제 방으로 가서 이제 공부 좀 하려고요 어머니 정말 사랑해요”(<수면제> 부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최광호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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