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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실타래 같은 세상…‘소외’는 없다, ‘소내’하라

등록 2014-01-05 19:37

김진석 인하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

소외되기-소내되기-소내하기
김진석 지음
문학동네·2만5000원

근대에 들어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서 인간의 인식 속에 당연하게 자리잡은 듯했다. 그러나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폭력은 그 보편적 권리가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줬다.

‘소외’라는 말을 만능에 가까운 분석틀처럼 가져다 쓰는 오늘날의 행태는 애초에 그런 간극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좌파와 우파, 중도를 막론하고 ‘인간 소외’, ‘자기 소외’, ‘노동의 소외’ 등 저마다 맥락은 조금씩 다르지만 소외라는 개념을 붙들고 있는 사유를 쉽게 만날 수 있지 않은가. 소외와 다른 ‘소내’, 초월이 아닌 ‘포월’, ‘기우뚱한 균형’, ‘더러운 철학’ 등 자신만의 개념어를 뿌리로 삼아 독창적인 철학을 펼쳐온 김진석(사진) 인하대 교수가 최근 <소외되기-소내되기-소내하기>를 펴냈다.

<소외에서 소내로>(2004), <포월과 소내의 미학>(2006) 같은 전작들을 이어, “소내 개념에 대한 작업을 철학 차원의 글쓰기를 통해 마무리한” 책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 책은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를 상정한 근대 초기에서부터 자유주의의 발전과 그 후기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주체가 마주해온 자유와 폭력의 모순을 ‘소외’라는 개념으로 모호하게 뭉뚱그려버린 지적 게으름에 대한 비판서라 할 수 있다.

먼저 지은이는 소외란 개념이 인간의 권리가 이전보다 줄어들거나 박탈되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애초에 ‘보편적인 권리’를 상정했던 근대 초기 자연권 사상 및 사회계약설의 출발과 더불어 생겨났다는 점을 짚는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보편적인 권리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그 권리를 현실적으로 담보해줄 수 있는 ‘사회적 몸’, 곧 주권을 지닌 정부를 함께 탄생시켰다. 인간의 보편적 권리는 이상 또는 가상의 수준으로 구축된 반면, 현실 속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보편적 권리를 중재할 ‘다수의 의지’에 강제로 예속될 수밖에 없는 모순이 벌어진 것이다. 지은이는 이 간극 속에서 실제로는 존재한 적도 없는 ‘소외’란 환상이 대두됐고, 모든 것을 소외 때문이라고 뭉뚱그리는 ‘극소외’ 현상이 벌어졌다고 짚는다.

자연권 사상 및 사회계약론의 출발이 ‘소외의 가설’을 불렀다면, 그 뒤에 이어진 경제적·정치적 자유주의의 전개는 ‘소내’의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지은이는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권력관계와 관련한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자유주의는 합리성에 근거해 근대적 주체들을 통치하는 체제로 발전했는데, 이러한 자유주의적 통치 질서는 “위험과 동시에 안전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곧 내부와 외부가 명확히 구분되고 초월적인 외부로부터 위험이 찾아오던 과거와 달리, 자유주의적 통치질서에서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 자체가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권력은 이전처럼 외부에서 억압적으로 찾아오지 않고 내부에서 유동적으로 작용하며,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려는 주체는 자발적으로 체제에 복종하게 된다. 이에 따라 물리적 폭력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줄어들지만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실천이 타자에 대한 다양한 비물리적 폭력과 연결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지은이가 소외의 문제를 계기로 삼아 독자들에게 묻고자 하는 핵심 고갱이는, 주체의 자유가 타자에 대한 폭력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나의 자유를 제대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느냐다.

여기서 가장 큰 전제조건은 이 실타래 같은 세계의 바깥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내되는’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환상과 다름없는 ‘외부’를 상상하는 것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보는 지은이는 차라리 ‘소내하기’를 제시한다. 자유와 안전, 위험의 삼각고리로 엮인 통치 시스템의 내부에서 소내되지 않고 ‘소내하는’ 방식으로 살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푸코가 ‘해방’과 구별되는 ‘자유’란 개념을 썼다는 데 착안한 지은이는 ‘책임 있는 자유’(리베르테 오블리주)를 제시한다. 또 이를 위해선 폭력과 자유 사이의 ‘기우뚱한 균형’ 속에서 ‘엉삐우심’, 곧 “엉뚱하고 삐딱하며 우스우면서도 심오한” 태도가 필요할 것이라 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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