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필’ 이후에도 꾸준히 책을 내놓고 있는 작가 고종석. 소설선집 <플루트의 골짜기>에는 그의 두 소설집에서 가려 뽑은 단편 여덟과 기존 단행본에 묶이지 않았던 단편 넷이 실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고종석 선집 5권 중 1권 출간
비관주의와 엘리트주의 뒤섞인
자발적 소외자들의 면모 담아
수록 단편 열둘 중 넷은 첫 공개
비관주의와 엘리트주의 뒤섞인
자발적 소외자들의 면모 담아
수록 단편 열둘 중 넷은 첫 공개
고종석 지음
알마·1만6800원 고종석은 절필(2012년 9월) 이전에도 바지런한 저술가였지만, 절필이 그의 생산력에 제동을 건 것 같지도 않다. 장편소설 <해피 패밀리>(2013년 1월)와 대담집 <고종석의 낭만미래>(2013년 9월)에 이어 절필 이후 세번째 책 <플루트의 골짜기>를 최근에 낸 것을 보면 그렇다. 알마 출판사는 그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독자들을 위해 다섯권 분량으로 ‘고종석 선집’을 기획했다. 고종석이 그간 낸 책 25권에 실린 글 중에서 알짜만을 엄선해 소설/언어/시사/문학/에세이 등으로 분류해 다시 펴낸다는 이 기획의 첫번째 책이 바로 <플루트의 골짜기>. 고종석은 <기자들> <독고준> <해피 패밀리> 세 장편 말고도 <제망매> <엘리아의 제야> 두 소설집을 낸 바 있는데, <플루트의 골짜기>에는 앞선 소설집들에서 재수록한 단편 여덟과, 잡지에는 발표했으나 기왕의 소설집들에 묶이지 않았던 단편 넷이 함께 실렸다. 표제작 <플루트의 골짜기> <이모>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우리 고장에선 그렇게 말하지 않아!>가 그것들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3분의 1은 단행본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셈이다. 표제작 <플루트의 골짜기>의 화자 ‘나’는 자신을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아닌 네안데르탈인이라 믿는다. 독일 네안데르 골짜기(네안데르탈)에서 두개골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은 이 종족은 비록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 멸종당하기는 했지만 이미 8만년 전에 곰의 뼈로 플루트를 만들어 불 정도로 지능과 감수성이 뛰어났다. “마흔 해가 훌쩍 넘는 세월을 그들 속에 섞여 살았지만, 나는 아직도 더러, 아니 자주, 그들이 낯설다. 좀더 솔직해지자. 나는 그들이 싫고 무섭다”며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 거리를 두고 “이 행성 어딘가에서 때로는 완전한 비관에 치여 때로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 우리 종족에 대해서, 우리 종족의 숨은 역사에 대해서” 자부심을 지니는 주인공에게서는 비관주의와 엘리트주의가 뒤섞인 자발적 소외자의 면모가 보인다. 고종석의 ‘절친’ 시인 황인숙을 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한 <이모>에서도 주인공인 시인 이모는 네안데르탈인의 후손처럼 보인다. 언니와 단둘이 살던 여고생 시절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다가 석 달 뒤에야 돌아왔던 이모는 어디를 갔었느냐는 질문에 “진짜 고향 말이야. 태어난 곳 말고, 내 핏줄이 떠나온 곳(…)어느 골짜기”라 답하는데, <플루트의 골짜기>를 읽은 독자라면 그 골짜기가 네안데르탈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쉬이 짐작할 법하다. “이모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고 음절을 뚝뚝 끊어 말할 때, 그것이 문득 다른 종의 생물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들렸”다는 조카의 증언이 그 짐작을 뒷받침한다. <이모>의 화자가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열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조카라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화자는 한국인 아내와 살고 있는 프랑스인 의사다. 그는 자신의 사촌처남이자 역시 의사인 민우와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결국 민우나 나는 그리스인인 것”이라고 술회하는데, 고종석의 책 <감염된 언어>에 실린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을 접한 이라면 다문화주의 선언과도 같은 이 말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독립한 제주공화국이 영어와 함께, 한국어가 아닌 제주어를 공용어로 삼는 가까운 미래를 상정한 <우리 고장에선 그렇게 말하지 않아!>가 고종석의 전공인 언어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보여준다면 <아빠와 크레파스>는 그의 첫 소설집에 실렸던 단편 <서유기>를, <피터 버갓 씨의 한국 일기>는 역시 첫 소설집 수록작 <찬 기파랑>을 떠오르게 해 흥미롭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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