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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저녁노을처럼 황홀한 마무리를 위하여

등록 2014-01-12 20:05

아흔 즈음에
김열규 지음
휴머니스트·1만5000원
지난해 10월22일 82살을 일기로 타계한 한국학자 김열규 전 서강대 교수의 유고집 <아흔 즈음에>가 나왔다. 지난해 4월부터 시작해 영면하기 전날까지도 쓰고 다듬었던 원고들이다.

“새벽녘 해돋이에 맞겨룰 저녁노을 같은 마무리로 아흔이 내일모레인 여든 넘은 나이를 가다듬고 싶다. 아니, 싶은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다.”

이런 각오로 책의 주제와 제목까지 미리 정해 놓고 시작한 글쓰기였다. 졸수(卒壽)라 일컫기도 하는 아흔을 앞두고 지난 삶을 돌이켜보며 삶의 완성이라 할 죽음에도 대비하고,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도 늙음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는 뜻에서였다. “글을 짓고 쓰는 것이 가장 요긴한, 가장 절실한 일”이라 생각하는 지은이는 늙음과 죽음, 병과 건강, 글쓰기, 추억, 이웃, 자연 등에 관한 생각을 편안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문장에 얹어 건넨다. 여든 굽이를 지나 아흔 고개를 향한 걸음을 짐짓 씩씩하게 내딛기는 했지만 고적한 노년을 엄습하는 허무와 허탈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순간이 왜 없겠는가.

“내가 무슨 빈 고무주머니인 듯 느껴진다. 머리며 가슴만이 비는 게 아니다. 온몸이 허물 벗은 매미 껍질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의 존재 자체가 아예 빈털터리가 된다. 내 속은 바람이 지나가도록 텅텅 비어 있다.” “삶이 무슨 쭉정이 같다. 흩어지다 만 몇 가닥의 꽃잎 같아 보인다. 여생(餘生)이란 그 말, 나머지 인생이란 그 말이 역겨워서 떨어내자고 해도 그게 쉽지 않다. 지겹도록 머릿속에 눌어붙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허무에 완전히 잡아먹히지는 않는다. 1992년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내려가 정착한 고향 고성의 산과 들을 거닐거나 원고 교정 보듯 마당의 잡초를 뽑는 일,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는 일, 무엇보다 70여권의 저서를 거느린 그가 필생의 업으로 여기는 읽고 쓰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독을 가리키는 독일어 ‘allein’을 모두를 뜻하는 ‘all’과 하나라는 뜻인 ‘ein’의 결합으로 새긴다. 고독이란 ‘온전한 하나’를 뜻한다는 적극적인 해석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가족·친지와 친구 및 이웃과 나눈 정의 세월을 돌이켜보는 한편 정(情) 자가 앞뒤로 붙은 한국어 낱말이 얼추 꼽아도 서른을 훌쩍 넘는다는 헤아림 끝에 그는 이렇게 쓴다. “한국인은 정이란 말에 정붙이고 살아왔다.” 같은 말을 이렇게도 한다. “주고 받고, 붙이고 떼고, 들고 나고, 맺고 끊고, 뜨거워지고 식고, 멀고 가깝고 하면서 정은 한국인의 마음을 차지해왔다.”

자신이 사는 마을의 노거수(老巨樹)를 우러르며 스스로도 나무처럼 “소슬하되 다소곳하고, 우람하되 고즈넉하게 노년의 삶을 다듬고 싶다”던 노교수의 마지막 날들이 책에는 오롯이 아로새겨져 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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