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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팔순 시인, 쓰러진 것들과 함께한 세월을 추억

등록 2014-01-19 19:51

팔순을 맞아 열한번째 신작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낸 신경림 시인.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다시 느티나무가>)고 썼다.  류우종 기자 <A href="mailto:wjryu@hani.co.kr">wjryu@hani.co.kr</A>
팔순을 맞아 열한번째 신작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낸 신경림 시인.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다시 느티나무가>)고 썼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치매 할머니와 중풍 아버지
최루탄 냄새 마흔살의 봄
그리움과 거부감 ‘양가감정’

사진관집 이층
신경림 지음
창비·8000원

올해 팔순을 맞은 시인 신경림이 신작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내놓았다. 1956년 등단 뒤 10년 가까이 공백기를 거쳐 첫 시집 <농무>를 출간한 것이 1973년. 그 뒤 40여년에 걸쳐 10권을 추가로 냈으니 평균 4년에 한권꼴이다. 오로지 글쓰기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전업작가로서 시 말고도 산문과 평론 등을 병행해야 했던 사정을 감안하면 묵묵하고 성실한 걸음이라 하겠다.

<낙타>(2008) 이후 6년 만에 선보인 새 시집에서 시인의 시선은 자주 가깝거나 먼 과거로 향한다. 그 시선은 일차적으로는 지나가 버린 날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지만, 과거에 비추어 부박하고 표피적인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오가면서도/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 메데진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이스탄불에서 키예프에서/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부분)

시집 앞머리에 실린 이 시는 어머니가 두 발로 감당했던 아날로그적 이동 거리와 시인 자신이 비행기라는 문명의 이기에 얹혀 오갔던 지구 곳곳을 대비시키면서, 독자로 하여금 경험의 폭과 깊이 사이의 불일치 내지는 반비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이끈다.

물론 시인은 과거 회귀론자가 아니며, 지나간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무책임한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치매 앓던 구순 할머니와 중풍으로 다리 절던 아버지, 몸에 밴 매캐한 최루탄 냄새로 기억되는 마흔살의 봄을 떠올리며 시인이 “지금도 꿈속에서 찾아가는, 그 봄이 싫다./ 그리워서 찾아가는 나의 젊은 날이 싫다”(<나의 마흔, 봄>)고 말할 때 그 말을 온전히 반어법으로만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토록 싫은 마흔살의 봄이 “그리워서” “꿈속에서” 찾아간다는 진술에 유의해 보자. “어쩌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한다는,/ 헤어나도 언젠가 다시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나의 마흔”(<나의 마흔, 봄>)은 적어도 그리움과 거부감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 번지가 없어 마을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번지/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지금도 이 번지에 산다”(<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부분)

<나의 마흔, 봄>과 비슷한 배경과 정서를 지닌 작품이다. 시인이 엄연히 떠나온 산동네에 여전히 살고 있노라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그리움의 표현일 테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난한 사랑노래>를 떠오르게 한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이 시집에는 시인의 또 다른 대표작 <목계장터>와 포개 읽고 싶은 작품도 있다.

“불도저가 파헤치고 있는 것이/ 강바닥이 아니라 제 심장이라는,/ 다이너마이트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바위너설이 아니라 제 팔다리라는,/ 오랜 촌로들의 항의 따위 한낱/ 힘없는 넋두리로만 들리는 강마을은 서럽다.”(<옛 나루에 비가 온다> 부분)

마지막으로, 시인이 20여년 전에 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을 연상시키는 작품을 읽어 보자. 시인의 지난 삶과 시를 결산하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부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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