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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너의 말을 들려줘, 나의 이야기를 해줄게

등록 2014-02-16 19:47

신예 작가 백수린의 첫 소설집 <폴링 인 폴>은 개성으로 포장된 치기와 전략 대신 성실성과 끈기로 무장한 ‘정통파’의 출현을 알린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신예 작가 백수린의 첫 소설집 <폴링 인 폴>은 개성으로 포장된 치기와 전략 대신 성실성과 끈기로 무장한 ‘정통파’의 출현을 알린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백수린 단편 9개 묶은 소설집
말을 하고 듣는 행위 자체에
삶을 지탱해주는 진실 깃들어
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문학동네·1만2000원

신예 작가 백수린(32)의 첫 소설집 <폴링 인 폴>에는 아홉 단편이 묶였다.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거짓말 연습>이 포함된 것은 물론인데, 수록작 중에 이보다 먼저 발표된 작품이 있어 눈길을 끈다. <자음과모음> 2010년 가을호에 실렸던 <유령이 출몰할 때>(발표 당시 제목은 ‘그곳에 유령이 출몰했다’)가 그것이다. 두 작품을 편의상 등단작과 예비 등단작이라 한다면, 등단작은 그것대로 등단작답고 예비 등단작은 역시 예비 등단작답다는 느낌이 든다.

먼저 예비 등단작. 몇년째 고시에 낙방하고 있는 화자 ‘나’는 자신이 대학을 다녔던 케이(K) 구역이 유령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골이었던 카페 ‘카르페디엠’을 찾아간다. 짝사랑했던 선배가 아직도 그곳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카르페디엠은 어떤 곳이었나.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자작시를 한 구절씩 돌려 읽고,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고, 또 누군가에게 차였다. 한껏 부풀었던 마음 따위가 쉽사리 출렁였다. 시위는 이국에 대한 풍문처럼 낯설었고, 취업 준비는 부역행위처럼 간주되던 그 밤, 우리에게 충만한 것이라고는 오로지 감수성뿐이었다.”

인용한 구절이 알려주는 것은 그곳이 낭만과 순수, 열정의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운동권에도 취업권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는 대책 없는 젊음이 그곳의 지표였던 것. 유령의 심부름꾼 바람이 건물 창문을 흔들어대는 가운데 나와 선배가 “카르페디엠을 더욱 힘차게 끌어안았다”는 소설 마지막 대목은 서투를지언정 순수한 열정을 놓치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등단작 <거짓말 연습>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말에 대한 관심이다. 주인공은 프랑스에서 어학 연수 중인 여성. 남편과는 이혼을 고민할 정도로 틈이 벌어졌고 어학원 이후의 진로는 불투명한 상태다. 서투른 현지어로 불충분한 의사소통을 해야 하기 때문에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의 부스러기들이 언제나 내 안을 둥둥, 떠다녔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하는 전도된 상황에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어느날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 “이곳에 진실한 것이 하나라도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행위,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설사 거짓말일지라도 말을 하고 또 듣는 행위 자체에 일말의 진실은 깃들어 있으리라는 믿음. 그 ‘말’을 글쓰기 또는 소설 쓰기라 이해한다면 <거짓말 연습>이야말로 신예 작가의 출사표로서 맞춤하지 않겠는가.

언어에 대한 관심은 표제작을 비롯해 다른 작품들에도 이어진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삼십대 중반 여성. 그러니까 등단작을 뒤집어 놓은 형국이다. 자신의 학생인 여섯살 연하 재미동포 청년 폴을 짝사랑하는데, 폴은 그에게 일본 여학생과의 연애를 상담해 온다. 주인공은 소설 끄트머리에서 “삶이란 (…)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결론에 이르는데 이것이 <거짓말 연습>의 결론과 통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감자의 실종>과 <꽃 피는 밤이 오면>은 나란히 언어 장애를 겪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장애의 형태와 원인은 조금 다른데, <감자의 실종>에서 방송국 성우인 나는 ‘개’를 ‘감자’로, ‘감자’는 ‘신념’으로 그릇되게 쓰는 증상을 보이고, <꽃 피는 밤이 오면>의 화자 남편은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노동자들이 사고로 죽은 뒤 실어증에 걸린다. <감자의 실종>의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한 증상을 겪는 이들의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면, <꽃 피는 밤이 오면>의 화자는 남편 회사의 죽은 노동자 아내가 부르는 ‘노래’를 받아 적기로 하면서 소설이 끝난다. 여전히 말을 하고 또 듣는(적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뜻이겠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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