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의 50%에 이르는 파격 할인가를 제시하고 있는 온라인 서점의 책 판매 페이지들. 문학서, 경제·경영서이지만 모두 ‘실용’으로 분류돼 신간인데도 큰 폭의 할인이 가능했다. 온라인 서점 화면 갈무리
실용서 등 예외 규정 악용해
문학·교양서를 ‘실용’으로 등록
반값 할인에 쿠폰 행사 기승
“예외없는 정가제로 법 개정을”
문학·교양서를 ‘실용’으로 등록
반값 할인에 쿠폰 행사 기승
“예외없는 정가제로 법 개정을”
각종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파격 할인 책’들이 범람하고 있다. 출간 18개월이 안 된 책은 마일리지 포함 최대 19%까지만 할인하게 법이 정하고 있는데도 이런 가격 경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책이 ‘실용’으로 분류될 경우에 예외를 둔 공정거래위원회 고시 때문이다. 출판사들은 이런 예외를 이용해 문학·어린이·경제·경영서를 내고도 이를 실용서로 등록해 가격 할인에 나서고 있다.
지난 13일 현재 대형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한 책들을 보자. 교보문고 온라인 주간 종합순위 1위를 달리는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홍익출판사)은 정가의 30%를 깎아주고 3000원 할인쿠폰도 제공하고 있다. 경제·경영 분야 1위인 <퍼펙트 워크>(다산북스)는 교보문고에서 6일 동안 반값 할인을 한 데 이어 11~13일엔 예스24에서도 반값 할인을 진행했다. 자기계발 분야 1위 <다윗과 골리앗>(21세기북스)은 2000원 할인쿠폰에 아이패드 미니와 백화점상품권을 주는 추첨 행사까지 진행중이다.
세 책 모두 지난 1월 나온 신간으로 현행 출판문화산업진흥법(출판법)상 19% 넘게 할인할 수 없다. 도서정가제를 담은 이 법 22조 3항은 판매자가 정가의 10% 이내에서 할인해 판매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온라인 서점은 할인된 금액의 10%까지 마일리지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 실질적으로 19% 할인이 가능해졌다.
문제는 예외 조항이다. 출판법이 발행일에서 18개월이 지난 구간은 도서정가제의 적용을 받지 않도록 한데다 2005년부터 공정위가 고시를 통해 국립중앙도서관이 부여하는 코드를 기준으로 ‘실용’과 ‘학습참고서2’로 분류된 책까지 제외한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국제표준도서번호(ISBN) 부가기호를 통해 독자에게 책 정보를 0~9번으로 분류해 제공한다. 1번이 ‘실용’, 6번이 ‘학습참고서2’다. ‘학습참고서2’는 ‘초등학생 학습 참고서’를 뜻한다. ‘실용’은 ‘실무에 관계된 실용적인 내용의 도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도서, 일반인 대상의 어떤 목적을 가진 수험서적’을 뜻한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출판사가 적어 낸 분류코드를 책 내용과 꼼꼼히 대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서관 쪽은 “2명의 담당자가 하루 1000건을 처리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도서정가제에 이런 예외를 둔 이유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도서의 경우 가격이 너무 무너지면 지식정보물의 창작 의욕이 무너질까봐 정가제를 보호한 것”이라며 “대신 수험서나 기능적인 내용을 담은 실용서적의 경우 창작 의욕과는 연관성이 높지 않으므로 예외로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몇 출판사들은 이를 악용하고 있다. 세계문학 선집을 내는 출판사 더클래식의 경우 모든 책에 영문판을 더해 이를 모두 ‘실용’ 코드로 분류해 반값 할인을 하고 있다. <다윗과 골리앗>, <당신의 가난을 경영하라>(원앤원북스) 같은 경제·경영서, 자기계발서는 ‘실용’ 코드로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보일 정도다. <어린이를 위한 99도씨 이야기>(인사이트북스)같이 자기계발서의 어린이 판본이거나 동화책이지만 영문판을 함께 내 ‘실용’ 코드를 받는 경우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도서출판 휴는 신년 선물용으로 책 3권을 묶은 ‘법륜 스님 양장 세트’를 내놓으면서 기존에 ‘교양’으로 분류했던 책을 ‘실용’으로 바꿔 등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출판사들은 이들 책의 성격이 ‘실용’에 가깝다고 인정하고 있을까. <내가 사랑한 유럽…>에 출판사가 붙인 홍보 문구는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초감성 에세이”다. <다윗과 골리앗>은 “세계 최고의 스토리텔러이자 경영사상가 말콤 글래드웰 필생의 역작”이다. 기능적인 성격만 강조된 ‘실용’ 서적과는 거리가 먼 문구들이다. 한 출판사 대표는 “실용으로 분류하는 것은 출판사의 양심 문제”라며 “하지만 가격을 대폭 할인하면 빠른 속도로 책이 많이 팔리니 출판사 입장에서는 차라리 광고비를 줄이고 파격 할인에 나서는 것이 이득”이라고 말했다.
‘실용’ 코드를 통한 편법 할인이 기승을 부리면서 출판계에서 자정 움직임도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한국출판인회의가 함께 운영하는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가 무리하게 ‘실용’ 코드로 분류해 가격 경쟁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 출판사에 전화나 문서를 통해 자제 요청을 하고 있다. 또한 출판유통심의위원회의는 편법 할인 실태 조사에 나섰다.
모든 도서에 대한 정가제를 규정하는 법안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최재천 의원(민주당)이 대표발의한 출판법 개정안이 1년 넘게 계류 중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프랑스는 지난해 책을 판매할 때 가격 할인과 무료배송을 동시에 제공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며 작은 서점 보호하기에 나섰다”며 “우리도 출판계와 서점·유통업체 사이의 의견차를 좁혀 하루빨리 도서정가제를 제대로 지킬 수 있는 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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