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눈송이 왕국’서 만나는 보편적 운명과 개별자의 고독

등록 2014-03-02 19:57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은희경. 등단 20년째에 낸 열두권째 책이 “스침과 흩어짐”에 대한 생각에서 빚어져 나왔다고 밝혔다.  문학동네 제공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은희경. 등단 20년째에 낸 열두권째 책이 “스침과 흩어짐”에 대한 생각에서 빚어져 나왔다고 밝혔다. 문학동네 제공
낯선 곳 당도해 고투하는 게 삶
떠나고 싶다는 꿈만이 뿌리 지탱
삶의 또다른 본질인 우연을 묘사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은희경 지음
문학동네·1만2000원

은희경의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를 읽다 보면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번역 소설이 떠오른다.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2009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장편이라고는 하지만 단편 열셋이 모인 연작으로, 은퇴한 여교사 올리브 키터리지를 중심에 놓고 그가 사는 마을 크로스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각도로 그렸다.

은희경 소설집에도 표제작을 포함해 여섯 단편이 묶였는데 그중 한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중복출연’하거나 인척 관계로 얽혀 있다. 안나라는 여주인공의 열아홉살 겨울을 다룬 표제작에서부터 시작해 안나의 시이모인 마리 할머니의 시점을 택한 마지막 작품 <금성녀>까지를 읽고 나면 안나와 마리와 현과 완(규) 그리고 완(규) 부모로 이루어진 대가족의 몇십년 세월을 곁에서 지켜본 듯한 친근감이 든다. 어디 이들뿐이랴. 안나의 친구이자 연적이었던 루시아, 안나가 짝사랑했던 루시아의 남자친구 요한, 완을 짝사랑한 학교 친구 소영, 건강하고 행복했음에도 일흔여섯 나이에 이해할 수 없는 자살을 택한 마리의 언니 유리까지 조연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삶 역시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다가온다.

보편성과 개체성의 관계를 인상적으로 포착한 책 제목은 일본 시인 사이토 마리코가 한국어로 쓴 시 <눈보라>의 한 구절이다. 은희경의 소설들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인간 보편의 운명과 개체로서의 고독 또는 자유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분투한다. 은희경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낯선 환경에 떨어져 적응하는 데 애를 먹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표제작의 주인공 안나가 절감하는 서울의 추위, <프랑스어 초급과정>의 여주인공이 막 조성되기 시작한 신도시의 신혼집에서 받는 격절과 소외의 느낌, <스페인 도둑>의 조기유학생 완이 현지 학생들에게 느끼는 단절감, 에서 미국에 갓 이민 온 엄마를 괴롭히는 불안과 불행감이 두루 그 사례들이다.

“매 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는 것이 삶이고, 그곳이 어디든 뿌리를 내려야만 닥쳐오는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어. 그리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꿈만이 가까스로 그 뿌리를 지탱해준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건 아닐 테지.”

<프랑스어 초급과정>의 주인공은 군 입대를 앞두고 술집에서 혼자 우는 젊은이를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낯선 환경 앞에 불안해하고 그에 적응하고자 고투하는 일은 소설 속 몇몇 인물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삶 자체의 본질에 해당한다. 같은 인물이, 이번에는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하는 말은 그런 취지를 담고 있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어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 (…) 그중에서도 나는 태어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같아요.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멀리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오는 거잖아요. (…) 뭐 하나 가르쳐드릴까요? 뿌리를 잘 내리고 싶다면 가벼워져야만 해요.”

우연은 이 소설집에서 작가가 공들여 묘사하는 삶의 또 다른 본질이다. “세상이란 참, 의외의 지점에서 얽히기도 한다니까”라고 <스페인 도둑>에서 완의 아버지는 말하는데, 이 소설집 전체를 그런 우연의 파노라마라 할 법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우연은 소설집 마지막 수록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체를 드러낸다. “열린 대문을 사이로 조카와 옆집 소녀의 눈이 마주친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마리의 시점에서 서술된 이 문장에서 조카는 완(규)의 엄마를, 옆집 소녀는 표제작의 주인공이자 현의 엄마인 안나를 가리킨다. 아마도 30년 전쯤이었을 당시 우연히 마주쳤던 동갑내기 두 소녀가 뒷날 사촌 시누 올케 사이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