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드릴로 장편 <화이트 노이즈>
밥먹을때나 섹스할때나
텔레비전 소리 들이마시고
상품과 상표명에 삶은 포위된다
“그걸 이기고 잠시라도 살수있어?”
이야기 축인 유독가스 유출사건
카트리나 재앙의 ‘예고편’ 닮아
미국 작가 돈 드릴로(69)의 장편소설 <화이트 노이즈>(1985)가 번역돼 나왔다. 강미숙 옮김, 창비 펴냄.
블랙스미스라는 이름의 소도시에 있는 사립대학의 히틀러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잭 글래드니와 그의 부인 배비트, 그리고 각자가 지난 결혼들에서 얻은 아들 한 명씩과 딸 한 명씩, 도합 여섯 식구로 이루어진 일가족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라는 대중매체, 그리고 온갖 물건들로 가득 찬 쇼핑센터가 이들 일가의 일상을 지배하는 양대 축을 이룬다. 식구들이 함께 밥을 먹거나 얘기를 나누거나 부부가 섹스를 하거나 심지어는 재난을 당해 피난을 할 때에도 그 배경에는 거의 언제나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소음이 깔린다: “이 크레디트 카드의 마케팅 비법은 무지개 홀로그램입니다”; “한편 이곳에는 어떤 해산물과도 잘 어울리는 간편하고 맛있는 레몬과즙이 있습니다”; “40만 달러가 걸린 나비스코 다이너 쇼어 대회에서는…” “쟈니가 무사도 권법으로 랠프의 슬개골을 가격하려고 합니다. 가격합니다, 그가 쓰러집니다, 그녀가 달려갑니다.”… 방송 소음은 주인공들이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이들의 삶에 밀착해 있다.
방송의 위력과 편재성에 대해 잭과 같은 대학에서 대중문화를 강의하는 머레이는 이렇게 표현한다.
“텔레비전 매체가 미국 가정의 원동력임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밀폐되고, 시간을 초월하고, 자기완결적이고, 자기지시적인 매체지요. 그건 마치 바로 우리 집 거실에서 탄생하고 있는 하나의 신화 같고, 꿈결 같고 전의식(前意識)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무엇 같기도 해요.”(92쪽)
같은 얘기를 ‘단순무식한’ 배비트의 아버지는 이런 질문으로 바꾸어 말한다: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멍청했었나?”(433쪽)
그렇다면 쇼핑센터는 어떠한가. 쇼핑센터와 그 안의 상품들 역시 방송과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의 삶을 감싸고 있는 또 다른 ‘공기’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잭의 시점을 빌려 이렇게 쓴다: “이런 상품들이 우리 영혼 속의 어떤 아늑한 집에 가져다주는 행복감, 안전감, 만족감으로 존재의 충만함을 성취한 것 같았다.”(38쪽) 반드시 쇼핑센터에 가지 않더라도 주인공들의 삶은 상품과 상표명에 둘러싸여 있는데, 소설 중간 중간에 아무런 맥락도 없이 출몰하는 합성섬유 상표명, 신용카드 상표명, 도료 등 집안 수리용품, 검 이름, 각종 약품명, 샴푸 이름 등은 그런 정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가난한 사람이 재해 타격받지”
방송과 쇼핑센터가 이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두 가지 축이라면, 소설의 서사를 이끄는 양대 사건은 ‘유독가스 공중유출 사건’과 향정신성 약물 ‘다일러’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잭 일가가 사는 동네 인근에서 유독가스가 유출되면서 벌어지는 재난과 그에 대한 대응의 묘사는 최근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자신들이 피난민 신세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잭이 배비트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은 뉴올리언스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예언처럼 들리기조차 한다. “이런 일은 노출된 지역에 사는 빈민들에게나 일어나는 법이야. 이 사회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자연재해나 인재의 주된 타격을 받도록 생겨먹었어. 저지대 사람들이 홍수피해를 받고, 판자촌 사람들이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에 당한단 말이야.”(199쪽) 잭은 “텔레비전에서 홍수 장면 보여줄 때, 대학교수가 자기 동네에서 보트 타고 노 젓는 장면을 본 적 있어?”라며 자신만만해하지만, 결국 그의 가족 역시 남들과 마찬가지로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들이 탄 차가 수용소를 향해 가는 동안 머리 위에서 목격한 유독가스 뭉치의 묘사는 백인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위협하는 어두운 진실을 상징하는 듯하다.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나선형 날개 달린 갑옷을 입은 생물들의 호위를 받으며 밤하늘을 가로지르면서, 마치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죽음의 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222쪽) 그 진실을 다른 말로 쓰레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식 대량소비문명의 필연적 부산물인 쓰레기 또는 잉여는 주인공 잭을 파멸로 이끈 원흉으로 인식된다: “이것들이 나를 파멸시키고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했으니까.”(513쪽) 파멸의 구체적인 내용인즉 이러하다. 최초로 유독가스가 발생했을 때 부주의하게 창문 밖으로 나가서 유독가스에 노출된 잭이 그에 감염되어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배비트는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누그러뜨려 준다는 수상쩍은 약물 ‘다일러’를 구하느라 몸까지 팔기에 이르는데, 이 두 사건은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잭이 다일러의 개발 및 제조자를 찾아가 권총을 쏘는 것으로 발전한다. 잭에게 내려진 ‘사형선고’가 아니더라도 소설은 시종 죽음의 문제를 파고든다. 비록 배비트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인물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결코 자유롭지는 않다. 잭의 말이다. “참 이상한 일이야. 우린 자신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깊고 끔찍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어. 그래도 우린 돌아다니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먹고 마시지.(…) 어떻게 우리가 그걸 이기고 잠시라도 살아남을 수 있어?”(344쪽) 죽음으로 통하는 ‘하얀 소송’ 배비트와 나누는 이 대화의 끝에 잭은 죽음을 일러 “균일하고 하얀 소음”(344쪽)이라 표현하는데, 소설의 제목 ‘화이트 노이즈’는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속성이 소음이라는 사실, 그리고 쇼핑센터에 간 잭이 “이곳이 소음으로 꽉 차 있음을 깨달았다”(66쪽)고 말하는 것을 참조한다면, 소음으로서의 죽음이란 곧 방송과 상품에 지배되는 현대인의 일상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죽음은 물론 불가피하고 끔찍한 사태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잭과 배비트에게는 네 아이가 희망과 행복의 근거가 된다. 잭은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절박한 신심(信心)”(271쪽)을 느끼거나 “형언할 수 없이 상쾌하고 마음이 넓어지는 느낌”(316쪽)을 받는다. 그런가 하면 배비트의 두 가지 간절한 소망은 남편 잭이 먼저 죽지 않는 것과 두어 살짜리 어린아이인 “와일더가 영원히 지금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409쪽)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세발자전거를 탄 와일더가 고속도로를 무사히 건너는 장면은 폭력적인 현대 문명 속에서도 일말의 희망의 근거는 살아 있음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방송과 쇼핑센터가 이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두 가지 축이라면, 소설의 서사를 이끄는 양대 사건은 ‘유독가스 공중유출 사건’과 향정신성 약물 ‘다일러’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잭 일가가 사는 동네 인근에서 유독가스가 유출되면서 벌어지는 재난과 그에 대한 대응의 묘사는 최근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자신들이 피난민 신세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잭이 배비트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은 뉴올리언스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예언처럼 들리기조차 한다. “이런 일은 노출된 지역에 사는 빈민들에게나 일어나는 법이야. 이 사회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자연재해나 인재의 주된 타격을 받도록 생겨먹었어. 저지대 사람들이 홍수피해를 받고, 판자촌 사람들이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에 당한단 말이야.”(199쪽) 잭은 “텔레비전에서 홍수 장면 보여줄 때, 대학교수가 자기 동네에서 보트 타고 노 젓는 장면을 본 적 있어?”라며 자신만만해하지만, 결국 그의 가족 역시 남들과 마찬가지로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들이 탄 차가 수용소를 향해 가는 동안 머리 위에서 목격한 유독가스 뭉치의 묘사는 백인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위협하는 어두운 진실을 상징하는 듯하다.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나선형 날개 달린 갑옷을 입은 생물들의 호위를 받으며 밤하늘을 가로지르면서, 마치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죽음의 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222쪽) 그 진실을 다른 말로 쓰레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식 대량소비문명의 필연적 부산물인 쓰레기 또는 잉여는 주인공 잭을 파멸로 이끈 원흉으로 인식된다: “이것들이 나를 파멸시키고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했으니까.”(513쪽) 파멸의 구체적인 내용인즉 이러하다. 최초로 유독가스가 발생했을 때 부주의하게 창문 밖으로 나가서 유독가스에 노출된 잭이 그에 감염되어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배비트는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누그러뜨려 준다는 수상쩍은 약물 ‘다일러’를 구하느라 몸까지 팔기에 이르는데, 이 두 사건은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잭이 다일러의 개발 및 제조자를 찾아가 권총을 쏘는 것으로 발전한다. 잭에게 내려진 ‘사형선고’가 아니더라도 소설은 시종 죽음의 문제를 파고든다. 비록 배비트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인물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결코 자유롭지는 않다. 잭의 말이다. “참 이상한 일이야. 우린 자신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깊고 끔찍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어. 그래도 우린 돌아다니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먹고 마시지.(…) 어떻게 우리가 그걸 이기고 잠시라도 살아남을 수 있어?”(344쪽) 죽음으로 통하는 ‘하얀 소송’ 배비트와 나누는 이 대화의 끝에 잭은 죽음을 일러 “균일하고 하얀 소음”(344쪽)이라 표현하는데, 소설의 제목 ‘화이트 노이즈’는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속성이 소음이라는 사실, 그리고 쇼핑센터에 간 잭이 “이곳이 소음으로 꽉 차 있음을 깨달았다”(66쪽)고 말하는 것을 참조한다면, 소음으로서의 죽음이란 곧 방송과 상품에 지배되는 현대인의 일상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죽음은 물론 불가피하고 끔찍한 사태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잭과 배비트에게는 네 아이가 희망과 행복의 근거가 된다. 잭은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절박한 신심(信心)”(271쪽)을 느끼거나 “형언할 수 없이 상쾌하고 마음이 넓어지는 느낌”(316쪽)을 받는다. 그런가 하면 배비트의 두 가지 간절한 소망은 남편 잭이 먼저 죽지 않는 것과 두어 살짜리 어린아이인 “와일더가 영원히 지금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409쪽)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세발자전거를 탄 와일더가 고속도로를 무사히 건너는 장면은 폭력적인 현대 문명 속에서도 일말의 희망의 근거는 살아 있음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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