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번째 시집 <바리연가집>을 낸 강은교 시인. “시의 궁극은 노래라고 생각한다”며 “생명, 시간, 계절 등 세상 모든 것이 리듬 아닌가”라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리는
설화 속 인물을 통해 삶 반추
경련은 병증이자 시의 원동력
설화 속 인물을 통해 삶 반추
경련은 병증이자 시의 원동력
<바리연가집>
강은교 지음
실천문학사·8000원 강은교 시인은 그동안 설화 속 인물 바리로 하여금 자신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세상의 고통에도 참예하도록 해 왔다. 부모에게 버림받았음에도 저승까지 건너가 죽은 아비를 살리는 신약을 구해 온 바리 이야기에서 그가 여성과 시인이라는 두 존재의 숙명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그런 곳을 생각한다/ 바리가 아비어미의 입술에 등꽃빛 숨살이 가지를 얹고, 바리가 아비어미의 입술에 등꽃빛 살살이 가지를 얹고, 바리가 아비어미의 가슴에 방울방울 약수를 춤추게 하는 등꽃빛 상여 위, 둥근 지붕이 거기 있는”(<둥근 지붕> 부분) 아예 <바리연가집>이라는 제목을 앞세운 강은교의 열세번째 시집 역시 바리의 발길과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 시인의 현재적 관심과 지향을 드러낸다. “너에게 밥을 먹이고 싶네/ 내 뜨끈뜨끈한 혈관으로 덥힌 밥 한 그릇”(<너에게> 전문)이나 “물소리에 기대앉아 바라보네/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네/ 나막신 한 켤레 들고/ 바라보네 바라보네// 이 밤/ 살아 있는 모든 것들 거룩해질 때까지”(<백무동 물소리>)와 같은 시가 구원자이자 나그네로서 바리를 노래한다면, 혜화동에서 배다리 헌책방을 거쳐 부산역과 서면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담은 시편들은 설화 속 바리를 시인의 삶 속에 포개 놓으려는 시도라 하겠다. “서류의 빈칸을 채워나가다가/ 변호사는 그 남자의 직업란에 이르러/ 무직이라고 썼다/ 그 여자는 항의하였다, 그는 무직이 아니라고, 시인이며 꽤 유명한 민주 운동 단체의 의장이었다고/ (…) / 그들은 요약되었다, 한 장의 이혼장으로/ 사유는 그 남자의 무직, 아니 무능”(<시(詩), 그리고 황금빛 키스> 부분) “어느 날 나는 그걸 발견하였지/ 당신이 버리고 간 시는 총 다섯 편이더군/ 그때 눈이 왔었는지, 만년필로 쓴 시가 눈물방울에 얼룩져 있었어/ 70년대, 유신 독재 시절에 쓰인 거였어/ (…) / 그렇게 그리워하던 꿈이/ 은백색으로 빛나며 목에 감기어/ 이젠 금빛으로 누래진 어떤 문학잡지 골짝 깊이 누워 있었어, ‘진보연합’이라고 쓴, 귀퉁이가 닳을 대로 닳은 봉투에 소중히 담겨서”(<봉투> 부분) 이혼한 남편인 고 임정남을 노래한 시편들은 이 시집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룬다. 시인의 대학 동기이자 ‘70년대’라는 동인을 함께 했던 임정남은 1970, 80년대 엄혹한 시절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느라 시에 전념하지 못했고 결국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떴다. 인용한 시들은 ‘무직’ 및 ‘무능’이라는 법률적·경제적 규정과 문학 및 진보라는 꿈 사이에 찢긴 고인에 대한 안쓰러운 그리움을 구체적 맥락 속에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그이는, 진보를 외치던 그이는/ 진보를 중얼거리다가 ‘진보연합’ 봉투, 꽃다발처럼 가슴에 안고 죽었지// (…) // 혁명도 진보도 물 건너갔어/ 이승이라는 방에서 저승이라는 방으로 물 건너갔어”(<중병>)라거나 “네가 버린 담뱃갑/ 네가 버린 구겨진 편지지/ 네가 버린 일회용 종이컵/ 네가 버린 껌종이, 이리 쿵덕 저리 쿵덕// (…) // 너로 하여 빛났던 저 잡풀/ 너로 하여 빛났던 저 모래바람 입은 안개/ 너로 하여 빛났던 저 땀의 혀, 이리 쿵덕 저리 쿵덕”(<불멸J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강은교 씨를 미리 추모함’이라는 부제를 지닌 <나의 거리> 그리고 <아아아, 오늘도 나에게 시를 쓰게 하는 것들>에는 “아직도 이유와 때를 모르는 나의 경련”과 “경련을 잠재워주는 내 평생의 연인들”인 알약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련이 단지 그를 괴롭히는 병증일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경련의 나의 스승, 나의 시, 나의 마지막 첫사랑”(<나의 거리>)이라는 구절에는 저주받은 운명을 구원의 역사(役事)로 바꾼 바리의 모험이 포개져 있지 않겠는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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