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짐꾼들이 지게에 돼지를 지고 장에 가는 모습. 일본의 종군기자였던 미국 소설가 잭 런던은 한국인이 잘하는 것은 묵묵히 짐을 지는 일뿐이라고 묘사했다. 글항아리 제공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글항아리·23만1000원 규장각 교양총서 1차분 10권이 완간됐다. 2009년 1권인 <조선 국왕의 일생>을 시작으로 1년에 두권꼴로 꾸준히 내온 결과다.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6년 왕립학술기관이자 도서관으로 세워진 규장각은 1910년 일제강점과 함께 학술기관으로서의 기능이 폐지된 채 도서관으로만 명맥을 유지해오다, 창설 230년을 맞은 2006년 한국문화연구소와 통합하면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연구 기능을 되찾은 규장각은 2008년부터 ‘규장각 금요시민강좌’를 열어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을 시도했다. 교양총서 시리즈는 그 결과물이다. 이 책들은 그동안 파편적으로 접했던 조선 시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모든 정보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첫 네권은 왕부터 양반, 여성, 전문가를 중심으로 조선 사람의 일생을 살피고, 5~7권은 조선사람이 본 세계, 외국인이 본 조선, 조선사람이 본 조선 등 기행문을 중심으로 조선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8~10권은 각각 일기와 실용서, 그림으로 본 조선으로 이뤄져 있다. 수십명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전공영역을 대표하여 쓴 글들은 당대의 원문과 도판 자료를 풍부하게 곁들여 지적 포만감을 선사한다.
1918년 일본으로 갔던 영친왕이 귀국할 때 덕수궁 석조전을 나서는 궁녀들. 글항아리 제공
일기·기행·그림으로 입체적 재구성
당대의 원문과 도판 자료 곁들여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종군승려로 전쟁에 참전한 게이넨(慶念)이 1597년 6월24일부터 1598년 2월2일까지 쓴 일기의 한 대목을 보자. “여기 전주를 떠나가면서 도중의 벽촌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죽이는 참상은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길을 가는 중에 칼에 베여 죽는 사람의 모습이여. 오지(五肢)가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없을 정도이구나.” 규장각 교양총서 6번째 책인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에 실린 게이넨의 종군 일기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전쟁의 비참함을 전하고 있다. 이 책에는 게이넨 말고도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조선에 귀화해 김충선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 ‘항왜’ 사야가의 사연, 조선 땅에서 가정을 꾸린 중국인 천만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국의 독자에게 <강철군화>(1908)로 잘 알려진 미국의 좌파 작가 잭 런던이 러일전쟁 당시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가 파견한 일본군 종군기자로서 조선을 기행하면서 쓴 글은 한국인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독설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일본으로 가려다 제주도에 불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의 상세한 내용도 접할 수 있다. 2권 <조선 양반의 일생>에서는, 평생 공부하느라 가정경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 같은 퇴계 이황이, 실은 수천 마지기의 전답과 150여명의 노비, 서너채의 집을 소유한 자산가였으며, 그것도 본인이 효과적으로 재산관리를 한 결과라고 밝힌다. 왕실과 집권층은 유교적 전통에 따라 남자 위주의 혼례 문화를 장려했으나, 민가에서 잘 받아들이지 않아 자식들이 장성할 때까지 신랑이 처가살이를 했고, 조선 후기까지도 혼례는 처가에서 지냈다는 사실도 밝힌다. 사옹원에 그릇을 공납하던 공인(貢人) 지규식이 쓴 일기인 <하재일기>는 조선 시대 ‘갑을 관계’의 단면을 이렇게 전한다. “내가 종일토록 애걸하였으나 도무지 들어주지 않고 기어코 며칠 안으로 마련해 바치라고 하였으므로, 나는 몹시 분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자와 칼날을 쥔 자의 형편이 같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내일 다시 와서 귀정짓겠다고 말하고 돌아왔다. 몹시 분통이 터져 자고 먹는 것이 편치 않으니 탄식할 만하고 탄식할 만하다.”(1891년 11월9일, 8권 <일기로 본 조선>) 4권 <조선 전문가의 일생>은 훈장과 의원, 궁녀, 화원, 승려, 천문역산가 등 숱한 직업으로 조선 시대를 엿본다. 그중 가장 흥미있는 내용은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사진실 교수가 전하는 광대 달문의 이야기다. “온몸이 유연하여 뼈가 없는 듯 삽시간에 몸을 돌려 뒤집”는 자반 뒤집기 같은 팔풍무(八風舞)와 주먹 입안에 넣기 등 몸 쓰는 재주뿐 아니라 재담이나 흉내내기 등 말재주도 능했던 달문은 오늘날로 치면 전국적 예능스타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팔아 덕을 보려는 자들의 농간으로 역모죄에 연루되어 무고하게 유배된다. 당시 조정은 달문의 무죄를 알면서도 처벌을 강행한다. 그의 인기가 너무 높아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임금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단죄부터 하고 보는 위정자들의 습성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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