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기 평전
강은기 평전 ‘…숨은 지사’ 발간
유신 시절 ‘비판 인쇄물’ 도맡아
유신 시절 ‘비판 인쇄물’ 도맡아
평생 ‘인쇄장이’로서 민주화운동의 버팀목 구실을 한 고 강은기씨의 평전이 나왔다. <민주화운동의 숨은 지사, 인쇄인 강은기 평전>(자유문고·사진)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2년 만에 발간됐다.
194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강씨는 64년부터 서울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인쇄공으로 일했다. 그는 박정희 유신체제가 출범하던 72년 세진인쇄를 차렸다. 그때부터 독재정권의 감시를 피해가며 각종 시국선언물, 광주항쟁 화보집, 재야단체 기관지와 소식지 등 ‘불온한 인쇄’를 도맡았다. 70·80년대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는 늘 세진인쇄에서 찍은 인쇄물이 뿌려졌다. 민주화운동 인사들은 “언론의 입이 닫혀있던 그때 세진인쇄는 ‘민주화운동의 펜’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강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형선고를 받은 뒤 제기한 ‘김재규 항소 이유서’를 인쇄해줬다는 이유로 80년 구속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연행·구속을 반복한 그는 서울시내에서 잡혀가보지 않은 경찰서나 정보기관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그 시절 지인들에게 ‘송구영신’ 대신 ‘송군영민’(送軍迎民)이란 연하장을 늘 보냈다. 군사독재가 어서 물러가고 민주주의가 빨리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2002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 김근태 민주당 고문의 아내 인재근 의원(새정치연합)은 “그는 엄혹한 군사독재시절 누구도 할 수 없는 힘든 일을 소명감으로 해낸 강단있는 분이다. 수없이 많은 연행과 구속, 사업상 스트레스가 결국 암 발병으로 나타난 것 같다”고 회상했다. 한승헌 전 감사원장도 “그의 헌신은 이 나라 민주화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줄 것이다. 광기에 휘둘리던 이땅을 민주세상으로 바꾸어 보겠다고 특이한 역할 분담을 자임했다. 독자들이 그를 기억하고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전 저자인 김영일(56)씨는 강씨가 투병중인 2002년 병상에서 구술한 내용을 정리해두었다가, 최근 주변인물 인터뷰 등을 보태 책으로 엮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민주인사 평전사업에 지난해 선정된 것이 계기가 됐다. 김씨는 “강 선생은 민주화운동 인쇄물을 거의 모두 외상으로 찍어줬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미안한 마음을 제대로 갚지도 못했는데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책 제목에 ‘숨은 지사’를 넣은 것도 그런 이유”라고 말했다.
11일 오후 6시30분 서울 정동 성프란치스코회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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