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거주하는 서울 용산구 일대를 산책하고서 쓴 에세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를 출간한 문학평론가 이광호. 이 사진을 찍은 효창공원에 대해서는 “용산의 순결하지 못한 시간들을 압축해 놓은 듯하다”고 적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이광호 지음
난다·1만2000원 “용산은 애써 지우고 싶은 식민과 이식의 역사와 모욕과 단절의 시간이 폭력적인 개발을 호출하는 기이한 장소이다. 불균등한 시간들이 어지럽게 교차하면서 일상적 우울과 권태와 뒤섞일 때, 용산의 ‘과도한 산문성’이 만들어진다. (…) 여기는 모더니티의 지옥이며 모더니티의 심연이고, 여러 수준의 모더니티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장소, 모더니티의 폐허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서울예대 문창과 교수·사진)의 눈에 비친 용산은 근대화의 여러 층위가 뒤섞인 흥미로운 공간이다. 그곳은 역사와 현실이, 시간과 공간이, 수평과 수직이 서로 스며들고 포개지면서 그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독특하고 기이한 풍경을 연출한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압축 근대화의 시간을 통과해 온 이 땅 어느 곳인들 그런 다층적 근대성에 노출되지 않은 곳은 드물 터. 그런 점에서 용산은 휴전선 이남 한반도를 대표하는 이름일 수도 있겠다. 인용한 문장의 출처는 출판사 난다에서 기획한 ‘걸어본다’ 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온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이다. 그 자신 삼각지에 살고 있는 지은이가 자신의 ‘동네’라 할 용산구 이곳저곳을 발로 걸으며 쓴 책이다. 말하자면 기행 에세이라 하겠는데, 그렇다고 관광 안내 책자도 아니고 본격 여행서도 아니라는 데에 이 책의 독자성이 있다. 책은 용산을 크게 서쪽과 동쪽과 남쪽으로 나누어 각 방위별로 작은 동네를 발로 걸으며 풍경과 상념을 기록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은이는 우선 자신이 사는 삼각지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 걸음의 첫 자리에 놓이는 것은 요절 가수 배호의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와 생태탕 전문 식당이다. 그렇게 시작된 걸음은 청파동, 용산역, 서부이촌동, 전쟁기념관, 해방촌, 이태원, 한남동, 국립중앙박물관, 남일당 터 등으로 이어진다. 식민의 역사와 단절의 시간이
폭력적 개발을 호출하는 장소 “대규모 가게나 주차시설조차 없는 경리단길을 걷는 것은 의식적인 외출이라기보다는 우연한 산책에 가깝다. 이 거리는 이태원의 피로감이 만들어낸 무심함의 형식이다. 어두워지면 이태원은 맹목적인 열기로 가득하지만, 이 거리에서는 부드러운 일몰의 사소한 충고를 들을 수 있다.” “이 역(=녹사평역)의 기하학적 화려함은 이 역 바깥의 풍경을 생각해 보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사람들로 붐비는 일이 많지 않은 이 역은, 거대하고 공허한 가설무대를 연상시킨다.” 인용한 대목에서 보듯 이 책은 용산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를 추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길을 걷는 지은이의 감각과 사념에 포착된 주관적인 용산이 우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역사적 배경 설명은 최소한에 머문다. 본업인 평론에서도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기로 호가 난 지은이답게 시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문장들이 책 안에는 그득하다. 가령 이런 대목. “봄의 시제는 가정법이다. 봄은 언제나 ‘봄이 오면’이라는 시간대로부터 다가온다. 봄은 만질 수 없는 꿈처럼 오는 것이다. 눈부신 것은 봄이 아니라 봄의 불가능함이다. 상냥하고 뼈아픈 계절, 날카로운 소망이 만들어낸 부재의 장소, 세상에 없을 익명의 시간.” 인용한 부분에도 등장하는 ‘부재’라는 사태 그리고 그에서 비롯된 상실감은 낮게 드리운 먹구름처럼 이 책의 정조를 규정한다. 거리를 산보하고 풍경에 눈을 주면서도 지은이는, 지금은 없는 ‘너’를 끊임없이 호출한다. 마치 자신의 산책이 사라져 버린 ‘너’를 찾으려는 걸음이기라도 한 양. “네가 없는 세계, 내가 세운 이 가묘 안에서 나는 한동안 말할 수 없는 시간에 매달려 있다. 나는 다만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애도는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다림이다. 나는 너라는 부재 속에 대기한다.” 책에는 지은이가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 30여장과 산책 경로를 담은 약도가 들어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걸어본다’ 시리즈는 강석경의 경주, 허수경의 뮌스터, 강병융의 류블랴나, 황현산의 비금도 등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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