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평전>을 낸 시인 안도현. “시를 쉬고 있는 틈을 이용해서 태어나서 가장 긴 글을 썼다”며 “백석 평전의 표준본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오류와 과장을 바로잡고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안도현 시인 ‘백석평전’ 출간
남에선 금기, 북에선 평가절하
2년간 자료조사 생애 면밀 재구성
“백석은 순수·참여문학 통합 보여줘
북한 방문해 행적 보완하고 싶어”
남에선 금기, 북에선 평가절하
2년간 자료조사 생애 면밀 재구성
“백석은 순수·참여문학 통합 보여줘
북한 방문해 행적 보완하고 싶어”
백석(1912~1996)을 좋아하는 시인이 한둘이 아니지만, 안도현 시인의 백석 사랑은 문단 안팎에 호가 나 있다. 백석 시 <모닥불>과 역시 백석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따온 구절 ‘외롭고 높고 쓸쓸한’을 자신의 두 시집 제목으로 삼으면서 백석 열성 팬임을 과시했던 그가 이번에는 아예 백석의 생애를 평전으로 정리해 내놓았다. 다산책방에서 낸 그의 새 책 <백석평전>은 45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에 백석의 삶과 문학을 차곡차곡 쟁여 넣었다.
“백석 시 <모닥불>을 처음 접한 게 대학 신입생이던 1980년이었습니다. 백석은 당시만 해도 재북(在北) 시인이었다고 해서 금지에 묶여 있었죠. 사회과학적 열정이 문학을 지배하고 견인하던 시기에 백석의 시는 제가 깃들일 거의 완벽한 둥지와도 같았습니다. 이른바 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서고 통합할 수 있는 길을 백석에게서 보았습니다. 백석은 엄혹한 일제강점기였던 1930, 40년대에 주요한 작품들을 썼는데, 문학적 모더니즘과 민족의식 및 현실 발언을 절묘하게 결합시켰다는 데에 백석 시의 특징이 있습니다.”
9일 낮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난 안도현 시인은 백석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남에서도 오랫동안 금기시되었고 북에서는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백석의 생애를 평전 형식으로 정리함으로써 시인으로서 그동안 백석에게 진 빚을 조금은 갚은 느낌”이라고도 했다.
<백석평전>은 만주에서 5년여 동안 황폐한 시간을 보냈던 백석이 해방을 맞아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내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통영 처녀 박경련도 없었고, 경성에서 마지막으로 본 자야도 없었다. 최정희도 노천명도 없었다. 평양에서 결혼을 하고 안둥과 신의주에서 잠시 같이 살았던 문경옥도 없었다. 조선일보에서 일하면서 자주 술잔을 나누던 신현중도 허준도 정현웅도 없었다. 함흥의 김동명도 한설야도 없었다.”(13쪽)
시인은 2년여에 걸친 자료수집 기간 동안 구할 수 있는 자료는 모두 구해서 읽고 그간 백석 생애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오류는 바로잡으며 최대한 객관적으로 백석의 삶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이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수필 두편을 처음 확인해 소개했고, 백석의 통영 방문 횟수가 모두 세차례였다는 점을 구체적 정황을 통해 밝혀냈으며, 백석 시로 잘못 알려진 <나와 지렝이> <늙은 갈대의 독백> <계월향 사당> 같은 작품들이 백석 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했다. “백석이 워낙 인기 있다 보니까 경쟁적으로 그의 작품을 ‘발굴’해 내는 분위기 속에서 그릇된 주장들이 난무했다”고 그는 말했다.
백석은 해방 뒤 고향 정주를 거쳐 평양으로 간 뒤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으로서 러시아 문학작품 번역과 동화시 창작 등에 매진했다. 그러나 1959년 양강도 삼수군 축산반 양치기로 내려간 뒤 1962년 이후에는 공식적인 창작 활동은 하지 못하다가 1996년 타계했다. 남북작가대회와 북한 어린이를 위한 사과나무 심기 사업과 관련해 북한을 8~9회쯤 방문했다는 안도현 시인은 “북쪽 시인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백석의 말년 삶에 대해 물어 보았지만 ‘전원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천편일률적인 답을 들었을 뿐”이라며 “북한을 다시 방문해서 백석의 행적을 확인하고 수정·보완해야 좀 더 완벽에 가까운 평전이 될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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