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
독일 주도의 자본통합체 유럽연합
대안으로 문화통합 ‘라틴제국’ 주창
아감벤 “EU 구성방식 문제제기일뿐”
대안으로 문화통합 ‘라틴제국’ 주창
아감벤 “EU 구성방식 문제제기일뿐”
<호모 사케르>로 유명한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사진)이 유럽연합(EU)의 개혁을 주장하며 제기한 이른바 ‘라틴 제국’론을 둘러싸고 유럽에서 국경을 넘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라틴 제국’ 논쟁은 지난해 아감벤이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실은 기고문 ‘라틴 제국, 반격을 시작하다!’로부터 촉발됐다. 라틴 제국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라틴어 사용권을 가리킨다. 현재 유럽연합을 주도하는 독일의 정치·경제 헤게모니에 대한 대안으로 ‘라틴 제국’이란 개념을 꺼낸 것이다. 독일 언론들은 아감벤이 ‘주도권을 쥔 라틴 문명 대 야만적인 게르만 문화’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독일을 비난하고 있다며 격한 분노를 쏟아냈다.
해를 넘겨 벌어진 논쟁에 아감벤이 최근 직접 해명에 나섰다. 그는 지난달 24일(현지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에 실린 인터뷰(‘끝없는 위기는 권력의 도구’)에서 “내 비판이 겨냥한 표적은 독일이 아니라 유럽연합이 구성된 방식”이라며 “독일의 저널리스트들은 유럽연합이 민주주의적 헌법으로 위장한 국가간 협약체라는 사실을 숙고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 “유럽연합은 정당성이 없는 기구”라며 “내 말에서 독일에 대한 비판을 식별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독일이 엄청난 철학 전통을 갖고 있지만 지금은 경제 중심의 유럽 이외의 것을 사유할 능력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아감벤은 유럽이 경제적 결합이 아니라 문화적·철학적 친족성(kinship)에 근거한 문화의 통합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구상은 1945년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드르 코제브가 내놓은 논의에 뿌리박고 있다. 2차 대전 직후 코제브는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이 미국 자본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며 문화적 동질성에 기초한 유럽 정체성을 ‘라틴 제국’이라 불렀다. 아감벤은 코제브의 ‘라틴 제국’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는 실체로서 의미가 깊다고 봤다.
이번 논란은 거듭되는 유럽의 경제·정체성 위기론와도 관련이 있다. 아감벤은 “오늘날 위기는 지배의 도구가 됐다”며 “위기는 시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에게서 결정가능성을 빼앗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결정들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이탈리아에서 ‘위기’를 빌미로 우익 베를루스코니 정부가 구성됐고, 이는 유권자들의 의사에 근본적으로 반하는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호모사피엔스에게 경제라는 이 유일한 차원을 넘어 인간의 행동을 새로이 조직할 순간이 왔다”고 강조한다. 경제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문화적 테제를 태동시켜야 하고, 그것이 유럽연합의 구상이 돼야 한다는 제안이다.
이런 그의 주장에 대해 최성만 이화여대 독문학과 교수는 “아감벤은 모든 것을 물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기조 속에서 유럽연합이 물질적으로만 통합돼 있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많은 전쟁과 갈등이 있었지만 함께 사는 법을 배워온 옛 유럽 문화를 강조하는 그의 논의는 지금도 큰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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