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를 낸 안상학 시인.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인간 관계와 선택 국면에서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그것 또한 삶이라는 순환 질서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인 만큼 받아들이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몸의 노쇠와 마음의 성숙 동반
죽음의 목록은 쌓여만 가고…
죽음의 목록은 쌓여만 가고…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안상학 지음
실천문학사·8000원 “숱한 봄/ 꽃잎 떨궈/ 깊이도 쟀다// 하 많은 가을/ 마른 잎 날려/ 가는 곳도 알았다// 머리도 풀어헤쳤고/ 그 어느 손도 다 뿌리쳤으니/ 사뿐 뛰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이제 신발만 벗으면 홀가분할 것이다” 안상학(52)의 다섯번째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앞머리에 놓인 <벼랑의 나무> 전문이다. 지금 나무는 모종의 결단을 앞두고 있다. 신발을 벗고 사뿐히 뛰어내리는 일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위태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지만, 사전 준비가 있었기에 사정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을 준다. 봄이면 꽃잎을 떨구고 가을이면 마른 잎을 날렸던 것이 깊이를 재고 방위를 챙기기 위함이었다니. 상실과 위기를 순리로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성숙하고 여유롭다. “나는 오늘도/ 쪼그리고 앉아야만 볼 수 있는 꽃의 얼굴과/ 아주 오래 아득해야만 볼 수 있는 나무의 얼굴에 눈독을 들이며/ 제 얼굴로 사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얼굴> 부분) “눈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라는 것/ 귀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라는 것”(<지천명> 부분) 인용한 시들 역시 억지를 부리는 대신 순리에 맞추어 살고자 하는 태도를 노래하는데, <지천명>이라는 제목에서 보다시피 그것은 몸의 노쇠와 마음의 성숙이 함께 찾아오는 중년 이후에 어울리는 경지라 하겠다. 봄밤의 조문을 다룬 시 <남원행>에서 “무거운 짐은 가볍게 지는 거가 맞네”라는 관찰을 내놓을 때에도 죽음의 충격과 무게를 가볍게 받아 안을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무르익은 연치 덕분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도통’ 내지는 ‘성불’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아픔과 회한이 없는 삶이란 그 얼마나 심심하고 재미없는 것이겠는가. 시인이 추구하는 것이 고통과 갈등의 현실로부터의 완전한 초월은 아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 / 그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 //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부분) “그만하고 가자고/ 그만 가자고/ 내 마음 달래고 이끌며/ 여기까지 왔나 했는데// 문득/ 그 꽃을 생각하니/ 아직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내가 보이네”(<늦가을> 전문) 연애시의 외양을 띤 표제작이 굽이굽이 인생행로에서 맞닥뜨리곤 했던 후회와 반성의 순간들을 불러온다면, <늦가을>은 앞서 인용한 <벼랑의 나무>를 떠오르게 한다. 두 시를 잇대어서 읽어 보면, 모든 준비를 마치고 홀가분하게 뛰어내리기만 하면 되는 순간, 발 아래 벼랑과 머리 위 하늘에 번갈아 눈길을 주면서 신발 벗기를 머뭇거리는 나무-‘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겠는가. 이별이란, 더구나 죽음이라는 최종적 헤어짐이란 그만큼 난해한 사태라는 뜻일 터. “오래 지날수록 더 그리워질 사람들의 오월/ 흰 꽃송이 더미더미 조문하는 오월입니다”(<오월> 부분) 흰 꽃 많은 5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이라 불렀다는 5월에 시인은 먼저 죽은 이들을 떠올린다. “하필 5·18 기념일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비롯해 “임병호, 박영근 시인, 권정생, 박경리 선생”에다 어느 해 5월23일 벼랑 끝으로 몸을 던진 정치인까지 죽음의 목록은 착실히 쌓여 간다. 5월 아닌 4월이었지만, 새파란 목숨을 침몰하는 세월호에 수장시켜야 했던 단원고 아이들의 죽음이 거기에 보태진다. “우리는 지금/ 천년의 장미를 찾아 수학여행 떠나는 길이에요/ (…) / 250개의 노래를 부를 거예요/ (…) / 250개의 이름을 부를 거예요/ 250개의 아침을 맞이할 거예요/ 250개의 봄을 맞이할 거예요”(<엄마 아빠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부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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