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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흔들리는 이여 그대 이름은 남자

등록 2005-09-15 18:19수정 2005-09-16 15:11

남자의 책, 무쇠 한스 이야기<br>
로버트 블라이 지음. 이희재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 1만2000원
남자의 책, 무쇠 한스 이야기
로버트 블라이 지음. 이희재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 1만2000원
여성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 성질과 짜증만 남은 ‘고개숙인 아버지의 시대’ ‘소년의 성장’ 독일 민담을 빌려 던진 숙제 자연과 마주하고 조화하며 성찰하는 진정한 ‘야성성’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차례상 준비하는 부엌의 여자들, 텔레비전 보며 고스톱 치는 안방의 남자들….’

최소한 대놓고 말하는 자리에선 사라진 명절의 옛 풍경이지만, 가부장제 흔적이 뿌리깊은 우리 사회에서 여자와 남자의 성 역할 또는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을 따져 나누는 것은 여전히 명절 때마다 더욱 높아지는 긴장과 갈등의 요소다. 올해 여자들의 한가위와 남자들의 한가위는 또 어떻게 기억될까.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말은 대개 여자들한테 애초부터 불리한 불공정 규율이지만, 그렇더라도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을 말할 만한 3%만큼의 근거는 존재한다. 남녀의 유전자가 97% 같고 3% 다르다니까, 97%의 양성평등 문제와 별개로 3%의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은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잖은가.

3%의 남자다움과 관련해, 미국 작가이자 신화분석가인 로버트 블라이는 요즘을 ‘아버지와 남자의 상실’ 시대라고 진단한다. 1991년에 <남자만의 고독>이란 이름으로 번역됐다가 이번에 새로운 책 꼴과 이름으로 출간된 <남자의 책, 무쇠 한스 이야기>(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에서 지은이인 블라이는 ‘진정한 남자다움’이 여성화 사회에 휩쓸려 사라지고 있다고 개탄한다. 귀여운 남자, 부드러운 남자가 넘쳐 나며, 젊은 남자는 강한 여자를 원하고 여자는 부드러운 남자를 원한다. 집에서, 사회에서, 아버지와 남자의 자리는 옅어지고 있다.

양성평등의 시대에 다시 남자다움이라니? 그 속엔 상실하는 가부장제를 그리워하는 음흉한 향수가 물씬 풍기지 않겠는가. 그건 오해라며 지은이는 책머리에서 미리 손사레를 친다. 여성 위에 군림하던 자리로 남자를 복귀시키려는 게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에 깊어진 ‘남자의 슬픔’을 말하려는 게 이 책의 의도라고.

그의 세태 진단은 이렇다. ‘아버지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야만적 남자다움은 수치스런 일로 더욱 자주 부각되고, 산업혁명 이후 일터에 매달리는 아버지가 집에 들어와 보여주는 건 남자다움이 아니라 고작 아버지의 성질과 짜증 부리기다. 아들은 이미 아버지한테서 남자다움을 배울 수 없다. 많은 아들들은 ‘남자다움의 굶주림’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그런 갈증을 채워줄 수도 없는 일이다. 남자와 아버지는 멸종하고 있다.’

남성다움의 가치는 실종하고 있는가,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군림하는 남자다움이 아닌 ‘진정한 남자다움’의 회복을 <무쇠 한스 이야기>의 지은이 블라이는 주장한다. 사진은 동물원에 봄나들이 나온 아버지와 아들의 정겨온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남성다움의 가치는 실종하고 있는가,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군림하는 남자다움이 아닌 ‘진정한 남자다움’의 회복을 <무쇠 한스 이야기>의 지은이 블라이는 주장한다. 사진은 동물원에 봄나들이 나온 아버지와 아들의 정겨온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가부장제 그리는 음흉한 향수?


‘남자여! 남자다워지자’고 권하는 그의 이야기는 중세 독일의 ‘무쇠 한스’ 민담을 통해 전개된다. 오랫동안 널리 퍼진 민담에 담긴 집단 잠재의식을 들여다보며, 거기에 담긴 ‘소년은 어떻게 단련돼 남자가 되는가’를, 곧 남자다움의 통과의례들을 들춰내 보자는 것이 그의 저술 기획이다. 여기엔 ‘야성성’과 마주해 자신을 단련하며 성숙해가는 한 소년의 여덟 가지 통과의례가 나타난다.

민담은 어느 왕의 여덟살 아들인 소년이 숲 속 연못 물속에 살다가 사냥꾼들에 의해 잡혀와 철창에 갇힌 털북숭이 거인을 우연히 풀어주고 함께 가출하면서 본격화한다. 녹슨 쇠 빛깔의 붉은 털북숭이 거인의 별명은 ‘무쇠 한스’다. 한스는 야성인의 상징이다.

소년이 겪는 연속적 사건들은 남자의 통과의례들로 해석된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어머니의 베개 밑에 숨겨둔 철창 열쇠를 훔치고, 야성인 한스의 목말을 타고 숲속으로 떠나며, 몸의 첫 상처가 너무 아파 괴로워하며, 삶의 나락에 떨어져 부엌에서 궂은 일을 하고, 정원사로 일하며 신성한 여인(공주)을 만나 야생화를 바치며, 전쟁터에 나서 자기 내면의 전사를 경험하며, 청혼하여 공주와 결혼하는 삶의 과정은 소년의 성장소설과도 같다.

민담에서 지은이가 찾아낸 열쇳말은 ‘야성성’이다.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첫 걸음은 야성성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깊은 연못 속에 누워 있다가 사냥꾼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와 소년을 만난 무쇠 한스는 바로 그런 야성성의 상징이다. 털북숭이는 다듬어지지 않고 순종되지 않는 자연과 본능 그것이다. “연못 바닥의 야성인을 건드린다는 것은…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말쑥하게 털을 자른 말끔한 남자를 양산하느라 기업들이 그렇게도 분주하게 돌아가는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외로움·고통·질병·밤과 어둠 그리고 우애·사랑·축복·힘의 첫 경험들을 겪으면서 새로운 사건들을 맞이하는 소년의 생명력은 야성인 한스와 따로 또 함께 헤쳐가는 사건들 속에서 하나둘씩 발견된다.

지은이는 자신의 열쇳말인 ‘야성성’이 ‘야만성’과는 다르다며 분명한 선을 그었다. 영혼 없이 무반성적인 폭력성이 ‘야만성’이라면 자연을 당당히 마주하며 조화하는 남자다움은 ‘야성성’이라는 게 그의 풀이다. “야만의 자세는 영혼, 지구, 인류에 몹쓸 해악을 끼친다. 야만인은 어디를 다치더라도 진찰을 피한다. 하지만 야성인은 상처를 스스로 진찰하는 사람이다.” “야성인은…그의 몸을 뒤덮은 털은 사슴이나 매머드의 털처럼 자연스럽다. 그는 수치심으로 면도해서 깨끗하게 하지도 않고…(소년의 통과의례 경험처럼) 가혹한 단련을 거친 뒤에야 완전히 소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민담 이야기는 결국 ‘진정한 남자의 영혼’을 회복하자는 것으로 들린다. 현대 산업사회가 소멸시킨 야성적 통과의례들을 기억해내고 그런 남성적 가치를 기꺼이 맞으며 남성다움의 생명 에너지를 되살리자는 얘기다. “우리는 그냥 뻣뻣한 막대기 위에 얹힌 몸이 아닌, 넘쳐 나는 욕망을 모두 담아 낼 수 있을 만큼 팔팔하고 감수성이 강한 몸을 만들어야 한다.” 남자들의 남자다움이든 여자들한테서도 언뜻 발견되는 남자다움이든, 남녀 구분 없이 잃어버리고 있는 남자다움은 현대사회가 잃어버린 야성인, 야성성의 모습이다.

남자의 통과의례 전통 되새김

지은이가 말하는 남자다움은 새로운 시대의 가치라기보다는 몇 천년에 걸친 남자의 통과의례 전통과 정신분석학을 되새김질해 얻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남자다움은 지금 시대에 그대로 비춰 이해하기엔 다소 어색함도 뒤따른다. 다만 여성적 가치를 드높이는 사회의 관심이 커질수록 그늘이 더욱 길게 드리우는 남성적 가치, 그리고 아버지의 자리는 어떤 모습으로 복원돼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이 책은 제공한다. 진정한 남자의 영혼에 귀기울여야 할 사람은 남자, 특히 아들을 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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