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시집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를 낸 김근 시인. “내 시가 노래여서,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위험하기도 한 노래여서, 그 노래가 이 세계로 파고들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김근의 세번째 시집 ‘당신이…’
원로작가 박상륭식 어투 여전
행갈이 않는 산문시 형식 불구
정형시 뺨칠 리듬감 입에 감겨
원로작가 박상륭식 어투 여전
행갈이 않는 산문시 형식 불구
정형시 뺨칠 리듬감 입에 감겨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김근 지음
문학과지성사·8000원 김근 시의 독특한 효과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의고적 어투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빚어내는 또래 시인은 적지 않지만, 김근과 비슷한 말투를 구사하는 이는 따로 찾기 어렵다. 김근 시의 어투가 원로 작가 박상륭의 소설을 닮았다는 관찰은 일찍부터 제출되었다. 그런 특징은 새로 나온 그의 세번째 시집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에서도 여전하거니와, 가령 이런 대목이 대표적이다. “육시랄 놈의 기다리는 일이나 보채고 안달하고 멈추지도 못하고 앉아만 그저 있더란, 말하자면, 말이시,인데(…)목구멍으론 여적지 바람 소리만 흐엉흐엉 들고 나고 새고 자빠를 졌는데”(<뒷모습> 부분) ‘박상륭 투’라는 지적에 대해 김근 자신은 다소 방어적이다. “고향이 전북 고창인데다 19세기에 태어난 분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말투”라면서 “이문구 선생과 박상륭 선생의 유장한 문장을 워낙 좋아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렵고 두려워서 박 선생님께는 아직 시를 보여드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어렵고 두렵기는 김근 시집에 대해 기사를 써야 하는 자의 마음가짐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 통독하는 동안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불온한 매력에 빠져 기사를 쓰기로 했지만, 막상 그 매력을 글로 풀어내자니 먹빛 어둠을 헤쳐 가듯 막막하기 짝이 없지 않겠는가. 밑줄 쳐 가며 세번을 거듭 읽고, 줄 친 부분은 타자를 치고 인쇄를 해서 손에 들고 다시 읽어 보아도 그 막막함은 좀체 가시지 않으니, “헛 이거 참 환장할 노릇이 아니고 또 무어란 말인가”(<뒷모습>). 그렇다면 바로 그 설명할 수 없는 매력에서 출발해 보자. “혹 그대가 아니었나 몰라 어젯밤 어두운 벌판에서 베었던 수많은 꽃모가지들 아무리 칼을 놀려 베어도 잘린 자리에 끝없이 돋아 피던 그 밤의 꽃들이 실은 그대가 아니었나 몰라”(<허허> 부분) “우리는 혁명을 기다리는 검은 그림자도 되지 못하고 그리움으로 뻗어나가는 푸른 이파리는 더더욱 되지 못하고, 하늘과 땅 사이를 쏘다니지요. 단지, 고삐 풀린 천사처럼.”(<지극히 사소하고 텅 빈> 부분) 김근 시의 매력을 말하면서 리듬과 호흡을 빠뜨려서는 곤란하다. 시집에 실린 상당수 시들이 행갈이를 따로 하지 않은 산문시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들은 정형률에 얹힌 여느 시들 이상으로 입에 착착 감기는 리듬감을 뽐낸다. <허허>의 잔혹미와 <지극히 사소하고 텅 빈>의 대책 없는 방종을 노래로 승화시키는 것이 바로 그 리듬과 호흡의 음악성이다. <지극히 사소하고 텅 빈>에서 확인하는바 부적응과 일탈, 추방과 망명의 정체성은 김근 시 세계를 관통하는 원리에 해당한다. 김근 시의 화자들은 “저 앞통수의 날들이 나는 무섭다”(<휴일>)며 “기다린 것은 언제나 뒷모습”(<뒷모습>)이었다 토로하거나 “밤이 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는 세상에서 “미약하나마 밤을 준비하”(<병 속에 담긴 편지>)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햇빛 가득한 날 비틀거리며 걷는 사내에게서 질질 흘러나온// 쓰고 지우고 다시 쓴, 또 지우고 그 위에 새로 쓸 이야기, 들”(<지워지는>)이 바로 김근의 시라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커다란 종기처럼 여자에게서 자랐다/ 나라는 고름 주머니를 달고 여자가 길을길을 갔다”(<길을길을 갔다> 부분) 시집 맨 앞에 실린 이 작품이 올해 초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시라면, 이모와 삼촌, 아비, 어미 그리고 조카 자신을 화자로 내세운 <조카의 탄생> 연작은 ‘김근의 탄생’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시들도 좋지만, 시집을 세번째로 읽으면서 비로소 눈에 들어온 아름다운 이별 노래 <당신의 날씨> 한 대목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다. “멀리 세월을 에돌아 어디서 차고 매운 바람 냄새 훅 끼쳐올 때// 낡은 거울의 먼지 얼룩쯤에서 울고 있다고 당신의 기별은 오고//(…)꽃처럼도// 나비처럼도 아니게 아니게만 기어이 살아서 나 또한 뒤통수 그늘 키우며// 눈도 못 뜰 세월 당신은 또 무슨 탁한 거울 속에서나 바람 부는가 늙고 늙는가”(<당신의 날씨> 부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