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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두려운 형과 두려움에 떠는 차남들의 세계

등록 2014-08-17 20:33

<차남들의 세계사>
<차남들의 세계사>
차남들의 세계사
이기호 지음
민음사·1만3000원
이기호의 두번째 장편 <차남들의 세계사>를 집어든 독자는 우선 아리송한 제목 앞에 고개를 갸웃할 듯싶다. 소설 속에서 제목의 유래를 알려주는 것은 주인공 나복만이 정보기관원의 강요로 베껴 써야 했던 편지 속의 이런 대목이다.

“보좌신부님은 그때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유효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우린 모두 형제들이고, 이 세상은 두려운 한 명의 형과, 두려움에 떠는 수많은 동생들로, 차남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 더 큰 문제는 우리 차남들 스스로가 형을 두려워하다가 숭배마저 하게 된 상황, 신보다 형을 더 믿게 된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셨지요.”

소설에는 또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는 서술도 나온다. 그렇다면 ‘차남’이란 가해와 피해, 억압과 굴종, 진실과 허위가 길항하며 습합하는 정치적 맥락을 품은 말임이 분명해진다.

고아원 출신 택시 기사 나복만이 엉뚱하게도 시국사범으로 몰려 고문을 당한 끝에 조직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평생을 수배자이자 도피범으로 지내야 했다는 게 이야기의 대강이다. “독재자 살인 사건을 수사하다가 독재자가 되어 버”린 전두환 장군 치하 80년대가 소설의 배경.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주도한 이들이 원주 교구에 들렀다가 자수한 일이, 원주에서 택시를 몰던 나복만의 삶을 망가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학식은 얕아도 심성만은 맑고 깨끗했던 나복만이 ‘한 건’을 노리는 정보기관원의 먹이가 되어 파멸하고 마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작가는 특유의 입심과 능청으로 유장하게 풀어나간다.

“우리의 누아르 주인공(전두환) 시절은 예지력 넘치고 날카로운 분석력과 판단력을 지닌 각종 요원들과 형사들이 전국 각지에 넘쳐나던 시기이기도 한데, 그들은 일단 자신들의 손에 넘어온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이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가정주부든 성직자든, 단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만드는, 아니 그 이상의 죄를 자백하게 만드는, 능숙하고 능란한 취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작가는 ‘들어 보아라’ ‘이것을 들어 보아라’ ‘이것을 똑똑히 들어 보아라’는 식의 허두를 앞세운 다음 본론으로 넘어가는 서술 방식으로 이야기에 집중할 것을 호소한다. 2009~10년 <세계의 문학>에 연재될 당시 제목은 ‘수배의 힘’이었는데, 그 제목을 풀어 설명하는 아래 대목이 소설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어쩌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나복만이 아닌 ‘수배’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그 말인즉슨 나복만에게 일어났던 운 없는 사건들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연속적으로 벌어진다면, 당신도, 나도, 그 누구도, 별수 없이 나복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소리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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