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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유럽좌파는 왜 기회를 놓쳤나

등록 2014-08-24 20:16수정 2014-08-25 14:26

<사회주의 100년-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
<사회주의 100년-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
한 주를 여는 생각
사회주의 100년-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
도널드 서순 지음, 강주헌 등 옮김
황소걸음·전 2권 9만2000원

오늘날 좌파 정당의 무기력함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미를 제외하면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좌파 정당이 늘 무기력했던 건 아니다. 특히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집권 경험이 풍부하다. 오스트리아 좌파 정당은 1970년부터 89년까지 무려 20년 동안 정권을 잡았다. 독일과 프랑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도 같은 기간 동안 거의 절반가량을 집권했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패망 뒤인 1990년대 후반에도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런데 이들은 왜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더구나 신자유주의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사망선고를 받은 지금 말이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역사가 도널드 서순은 <사회주의 100년>에서 좌파 정당이 과거에 안주할 뿐 미래를 향한 비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질타한다. “좌파의 부진이 (…) 더욱 의외인 이유는,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유럽인 절대다수(70% 이상)가 빈부 격차가 늘었고, 현재의 경제 제도가 부자에게 유리하며, 불평등이 심각한 문제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를 이용할 능력이 없는지, 의지가 없는지 모르겠으나 좌파의 전망은 암울하다.”

그리고 상상을 보탠다.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유례없는 호기를 활용해 유럽 대륙 차원에서 공동 정책을 개발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예컨대 그들이 공동으로 유럽연합(EU) 전체를 아우르는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거나 재분배를 위한 재정 정책을 개발했다면, (…) 사회민주주의가 살아남아 번성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그러나,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운 우리의 현실이라니.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자본주의가 강해진 건 사민주의 덕분이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국민국가’와 ‘복지국가’의 딜레마에 빠졌다. ‘자본주의 폐지’라는 목표는 버린 지 오래다. 이들은 완전히 실패한 것일까. 지은이는 하버마스의 말을 빌려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조한다. 인간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1904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한 국제 사회주의자들. 앞줄 가운데가 러시아 대표 게오르기 플레하노프(13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04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한 국제 사회주의자들. 앞줄 가운데가 러시아 대표 게오르기 플레하노프(13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세기 이후 카를 마르크스만큼 세계사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은 인물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 결과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 명제 자체에 토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탁월한 자본주의 분석가인 것은 맞지만, 공산주의 이론가나 혁명가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은 그가 주장한 대로 ‘과학’이었지만,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적 도래를 예견한 대목에서는 ‘종교’에 가까웠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는 비전을 던져놓았을 뿐 ‘어떻게’는 설명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설명하지 않은 ‘어떻게’의 두가지 길 중 하나가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며, 다른 하나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폭력혁명 대신 ‘자본주의 고도화’를 택했다.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에 좀더 충실한 선택이었다. 레닌의 실험은 이미 실패한 것으로 증명됐다. 그렇다면 서유럽의 길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복지국가나 부의 재분배 같은
사회민주주의 진영의 개혁이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폐지를 위해 싸웠지만
강한 자본주의를 만들고 만 아이러니

자본주의의 승리는 사실상
자본주의에 대한 규제의 승리였다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규제를 철폐한
후과는 2008년 금융위기로 나타났다

<유럽 문화사>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이집트 출신의 역사가 도널드 서순은 1996년작 <사회주의 100년-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황소걸음 펴냄, 원제: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에서 서유럽의 실험에 대한 평가를 시도한다. 무려 1778쪽, 2권의 방대한 부피로 국내에 첫 출간 된 이 책에서 지은이는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딜레마를 집중 분석한다. 결론은 이들이 ‘국민국가’와 ‘복지국가’의 틀에 갇혀 기껏해야 ‘일국적 자본주의’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이율배반적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딜레마는 복지국가나 부의 재분배 같은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진영의 개혁이 사회의 평화와 소비재 시장을 확대해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데 있다. (…) 이들은 자신들의 개혁이 성공할수록 자본주의의 번영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자본주의의 뒤를 따라다니며, (드물지 않게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압제와 불의도 포함해서) 압제와 불의, 착취와 차별에 대항하는 수많은 투쟁에 불을 지피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덕분에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위기를 겪지만, 스스로 결점을 치유하고 되살아나는 ‘터미네이터’가 됐다.

자본주의 폐지를 위해 싸웠지만(적어도 1989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스톡홀름 선언문’ 이전까지는 그랬다) 더욱 강력한 자본주의를 만들고 만 아이러니! 그러나 인권을 개선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한 그들의 기여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복지 제도 확립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사형제도 폐지와 동성애 합법화, 낙태의 비범죄화를 위해 싸웠으며, 다른 어떤 정당보다 일관되게 투표권 확대와 여성의 권리 확장을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섰다.

지은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더 강해진 자본주의는 ‘규제에 의해 더 강해진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그 규제가 주로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도입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19세기 사상가들은 크게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에 대해 기술했다. 완전한 실패작인 이런 자본주의는 국제적 전쟁, 권위주의 체제, 대량 실업 등 끔찍한 정치적 영향과 더불어 끊임없는 경제적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 자본주의의 승리는 사실상 자본주의에 대한 규제의 승리였다.”

최근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나타났다.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전세계는 “규제를 철폐하고, 관세를 낮추거나 없애고, 국유재산을 민영화하고, 보조금을 없”앴다. 그 결과가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한 것은 우파 신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잠시 고개를 숙였을 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활개를 치고 있다.

<사회주의 100년>의 지은이 도널드 서순 <한겨레> 자료사진
<사회주의 100년>의 지은이 도널드 서순 <한겨레> 자료사진
이에 대해 지은이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과거에 머물러 새로운 시도를 게을리한 탓이라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국민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유럽 전역에 효력을 미치는 ‘사회안전망’ 구축 같은 노력을 했다면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늘 해오던 방식으로 그 일을 했다. 일상의 정치에서 일어나는 우발적인 사건들과 선거를 고려해야 한다는 압력에 쫓겨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앞으로 나가는 것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은 확실한 패배를 약속한다.”

도널드 서순의 잠언 같은 말은 마치 우리나라 야당들한테 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들은) 무능하고 조직력 없는 과두제 지도부에 의해 운영되는 것으로 보였고, 그 지도부는 자신들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보통 사람들’의 대표와 거리가 멀었으며, 생경하고 낯선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 (…) 사회집단은 정권을 잡기 전에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 실제로 국가권력을 잡는 ‘순간’은 혁명 과정의 한순간일 뿐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잘못된 순간에 권력을 잡으면 장기적인 패배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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