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나치군 침공 소식을 듣고도 매일 파리국립도서관을 찾았던 발터 베냐민은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읽고 쓰기를 거듭했다. 한길사 제공
베냐민 사상 한국적 ‘문화 번역’
독문학자 문광훈 1100쪽 연구서 완성
“기존 연구 인정하나 한계” 논쟁 예고
독문학자 문광훈 1100쪽 연구서 완성
“기존 연구 인정하나 한계” 논쟁 예고
문광훈 지음/한길사·3만5000원 한 사내가 있다. 그는 지배질서와 다른 삶의 양식을 열렬히 희구한 유대계 독일 언어철학자, 이론가, 작가였다. 길잡이 없이 도시를 배회하는 산책자였으며 글쓰기로 주류에 대항한 아웃사이더였다. 뛰어난 학자였지만 강단에 서지 못했고, 부유하게 컸지만 생활고에 시달렸다. 홀로 아케이드를 보며 자본주의의 소외와 사물화를 떠올렸고, 별이 그려진 음료 광고 전단지에 ‘아우라’의 개념을 썼다. 발터 베냐민(1892~1940). 그는 파리를 점령해오는 나치의 군홧발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원고를 지키려 길을 나섰지만, 국경에서 오도가도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혁명 정치를 말하면서도 “계급 없는 사회라는 개념에 우리는 참된 메시아적 얼굴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해 신비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좌파들과 불화했고, ‘속세’에서 변방의 권리를 복원하려 홀로 고군분투한 사상가였다. 최근 나온 <가면들의 병기창-발터 벤야민의 문제의식>은 유대 신학적 사유와 역사적 유물론을 결합하며 독특한 신학적 유물론을 탄생시킨 베냐민의 사상 전체를 분석한 책이다. 나아가 그의 문제제기를 한국의 문화 지형에서 재해석하려 노력했다. 지은이 문광훈 충북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베냐민의 문제의식을 ‘가면들의 병기창’이란 말로 재현한다. 베냐민은 세상과 대결하는 무기로서 예술(가면)을 병기창에서 벼려냈고, 파시즘과 자본주의에 맞서는 가능성을 탐색했던 것이다. 지은이는 베냐민의 불가해한 “텍스트 미로”를 헤쳐가며 6년에 걸쳐 1100쪽 분량의 책을 썼다. 베냐민 사상에 큰 빚을 진 아도르노를 오래 연구해온 그는 “읽을 때마다 감각과 사고의 갱신을 이끄는 고전”으로서 ‘베냐민 읽기’를 독일 유학시절인 1993년께부터 기획했다고 한다. 각종 저작과 수백편의 논문, 메모 등 무질서한 베냐민의 글 무더기를 최대한 찾아 읽으며 1차 문헌 분석을 한 뒤 “비판적으로 대결하며” 논평하는 과정을 거쳐 “한국의 베냐민론”을 새롭게 펼치려고 했다. 책은 베냐민 문제의식을 역사, 정치경제와 법·신학, 예술, 기술·매체·번역·문화 분야로 나눠 총 4부에 걸쳐 검토한다. 문 교수는 “베냐민 문제의식의 중심부에는 문화예술이나 미학이 아니라 정치가 놓여있었다”고 밝힌다. 법의 정당성에 숨은 강제력을 회의한 베냐민은 바이마르 공화국(1919~33)의 혼란상 아래 터져나온 인간의 총체적 소외, 법의 오용을 지적한다. 신화를 재생산하는 실정법의 폭력과 권력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는 인간 개개인의 섬세한 감성·예의·사랑 같은 “마음의 문화”를 강조했다. 논리적 비약이라는 논란이 있지만 유물론과 유대교 신학의 연결을 추구하며 윤리성에 집착한 베냐민 사상의 특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반면, 학문적 동료였던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그런 신학적 함의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것이 일관된 이론을 설득력 있게 펼쳐나가려는 학자의 합리적 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베냐민은 그러지 않았다. 이에 지은이는 베냐민이 “신학과 역사유물론 사이의 양자택일을 거부함으로써 삶의 실패를 자초”한 것으로 본다. 더군다나 베냐민의 ‘메시아주의’는 초월이 아니라 ‘세속적 현실’에서 추구되었다. 역사학, 신학, 법학, 예술학, 경제사회학 같은 경계를 넘는 그의 통섭적 사유는 당시로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지금도 역시 일관된 분석이 불가능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창의성은 역설적으로 후대 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주며 끊임없이 재사유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사회를 변혁시키고 정치를 진전시키려는 이상주의자의 머리에는 유년의 꿈이 들어있고, 이 꿈 속에서는 유물론적 역사의지와 메시아적 구원에 대한 열망이 서로 얽힌 채 꿈틀댄다.” 아포리즘 같은 문 교수의 문장은 베냐민의 뉘앙스 가득한 비도식적 글쓰기에 대한 경탄으로 보인다. 올해는 국내 베냐민 연구의 신호탄을 올린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냐민의 저작은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번역돼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의 사상 전체를 재해석한 연구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2007년부터 <발터 벤야민 선집>(길·총 15권)을 펴내고 있는 최성만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지난 5월 <기억의 정치학>(길)을 출간해 눈길을 끌었다. 10월 초엔 <베냐민의 공부법>(권용선·역사비평)이 그의 저항적 연구방법과 글쓰기를 국내에 소개했다. 특히 <기억의 정치학>과 <가면들의 병기창>은 베냐민의 비평가적 면모를 포함해 사상의 전모를 밝힌 국내 학자들의 본격 연구서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우리말 옮김을 넘어 독자적인 분석력을 갖춘 ‘한국의 베냐민 문화번역’이 비로소 선보인 것이다. 문광훈 교수는 “문헌학자로서 성실성을 본다면 최성만 교수의 <선집> 15권 작업은 존중할 만하고, 이 분야 연구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단, 베냐민 해석의 비판적 재구성이란 차원에서 본다면 답답하고 도식적이어서 문헌학을 뛰어넘은 ‘자유로운 저자’라고 말하긴 어렵지 않겠나”라고 덧붙였다. “진정한 베냐민 읽기는 전적으로 새롭고 신선한 해석 속에 또 하나의 다른 베냐민을 창출할 때 비로소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각을 세운’ 서로 다른 학자들의 견해는 베냐민 사상에 대한 학술적 논의가 국내에서 지금보다 훨씬 풍부해질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한국의 베냐민들’이 길을 떠날 차례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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