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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은는이가’ 조사로 관통하는 인간과 세계의 이치

등록 2014-11-06 20:27수정 2014-11-06 21:22

명지대를 거쳐 이화여대 국문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정끝별 시인은 “중국 유학생들에게 한국어 조사용법을 가르치다가 <은는이가>라는 시를 착상했다”고 밝혔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명지대를 거쳐 이화여대 국문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정끝별 시인은 “중국 유학생들에게 한국어 조사용법을 가르치다가 <은는이가>라는 시를 착상했다”고 밝혔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정끝별 다섯번째 시집
조사·구두점 하나로 ‘다른 세상’
사회적 관심 드러낸 작품도 선봬
은는이가
정끝별 지음/문학동네·8000원

돈시: 돈에 울고 시에 웃다
정끝별 지음/마음의숲·1만1800원

시인이란 조사 하나 구두점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다. 기사문이 조사와 부사 따위를 곁가지로 보아 홀대한다면, 시인에게는 바로 그 우수리 품사들이 생명처럼 소중하다.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는 얼마나 다른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옛사람들이 말할 때 그이들은 벌써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 //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은는이가> 부분)

정끝별의 다섯번째 시집 <은는이가>의 표제작이 조사에 울고 구두점에 웃는 시인의 새가슴을 다룬 시는 아니다. 그보다는 ‘화성 남자 금성 여자’ 식으로 남녀의 내력 깊은 차이를 조사에 빗대어 노래한 작품이라 하겠다. 남자의 원심력과 여자의 구심력을 대비시켰지만, 반드시 남과 여의 성차(性差)에만 국한해서 이해할 일만도 아니다. 말하자면 원심력에 휘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심력으로 집중하는 사람도 있는 것. 그렇다면 이 시는 인간사의 핵심 이치를 겨냥한다 할 수도 있겠다.

“쩍 벌어진 으름 씨는 새가 먹고/ 굴러떨어진 헛이름은 개가 먹고/ 갓 벌어진 주름은 내가 먹고// (…) // 아뿔싸 입에 쩍쩍 들러붙는/ 가을 게으름이라니!// 음 물큰한 처음/ 졸음처럼 들척지근한 죽음/ 음음 잘 익은 울음// 오랜 으름 다 먹었다”(<으름이 풍년> 부분)

“더디더라도 더 더 더 아프고 나면/ 잎눈들처럼 여름을 품겠습니다 그때까지 낙타 누룩 누르하치 누나 늦별 기다리겠습니다”(<시> 부분)

영시나 힙합의 각운(라임)을 닮은 이 시들은 시인의 탁월한 리듬감 그리고 그 바탕을 이루는 언어 감각을 짐작하게 한다. 언어의 형태적 특성에 민감한 이런 자질에 더해, 독자의 마음에 잔잔하지만 질긴 파문을 일으키는 이미지와 어조의 구사로 해서 몇번이고 거듭 읽으며 음미하고 싶게 만드는 시가 이 시집에는 여럿 들어 있다.

“꿈에 돋는 소름 같고 입에 돋는 혓바늘 같고 물낯에 돋는 눈빛같이 미처 다스리지 못한 파문이라 하였습니다”(<불선여정(不宣餘情)> 부분)

“바람이 남기고 간 신열이었어 한 울음이 한 울음을 비껴가는 소리라고나 할까 세상이 조금 기울었던 거야 한 계절이 한 계절에 쏟아졌고 한 인과율이 한 인과율을 덮쳤던 거야 위반이란 속도의 차이야”(<사라가 찰스를 떠날 때> 부분)

‘이만총총’에 해당하는 편지 말미의 표현을 제목으로 삼은 <불선여정>은 물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뒤집힌 결말과도 같은 <사라가 찰스를 떠날 때>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지나간 뒤에 남은 것’이라고나 할 어떤 여운이다. 또 다른 시 <비어 있는 손>에 따르면 “끊긴 통화 이후에도 남아 있는 핸드폰의 온기” “돌아보면 아직 흔들리는 그네의 끄덕임” 같은 것들에 시인은 주목한다. 그것들은 얼핏 미약하고 비본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사와 우주의 이치를 감당하는 삶의 섬세한 속살이라는 점에서 조사 ‘은는이가’와 동급이라 할 만하다.

시집 뒤쪽에는 사회적 관심을 드러낸 작품들도 배치돼 있다. 석달 전 투신한 애인 곁으로 간다는 유서를 남기고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린 가난한 제자(<투신천국>) 그리고 다세대 주택 독방에서 자살한 지 다섯달 만에 발견된 남자(<원룸>)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어느덧 “자본론 대신 자본을, 선동 대신 선거를 믿게 된”(<각을 세우다>) 시인의 쓰라린 회한과 반성에 이어진다.

한편 정끝별 시인은 돈과 관련된 한국 시 66편을 모으고 시마다 짧은 해설을 곁들인 책 <돈시>를 아울러 내놓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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